FDA, 개인 맞춤 치료제 개발 가이드라인
대규모 임상 안 해도 돼 초희소질환도 가능
美 아기 위한 유전체 편집 치료 시도 계기
수술처럼 일상 될까, FDA의 희망고문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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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등 첨단 기술이 정치와 외교를 움직이고 평범한 일상을 바꿔 놓는다. 기술이 패권이 되고 상식이 되는 시대다. 한국일보는 최신 이슈와 관련된 다양한 기술들의 숨은 의미를 찾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 분석하는 '테크 인사이트(Tech Insight)'를 격주 금요일 연재한다.
유전질환인 ‘카르바모일 인산 합성효소 1(CPS1) 결핍증'으로 세계에서 처음 맞춤형 크리스퍼 가위 기술 기반의 유전체 편집 치료를 받은 아기 KJ 멀둔. 네이처 제공
"초희소질환의 무작위 대조시험은 거의 항상 실행 불가능합니다. 수십 년 동안 가족들은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환자가 충분하지 않다, 승인이 너무 오래 걸릴 것이다, 과학이 아이를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들입니다. 그것이 오늘 끝납니다." (지난달 23일,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
희소질환을 앓는 단 한 명의 환자를 위해 설계된 치료제가 정식 허가를 받는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최근 개인 맞춤 치료제 승인을 위한 '타당한 메커니즘 프레임워크(Plausible Mechanism Framework)' 가이드라인 초안을 발표하면서다. 임상시험 참여자를 모을 수 없을 만큼 환자가 극소수인 초희소질환도 제도권 내에서 치료제를 만들 길이 열린 것이다.
대규모 임상 없어도 치료제 허가한다
FDA가 지난달 23일 공개한 개인 맞춤 치료제 허가 조건은 다섯 가지다. ①질병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생물학적으로 규명돼야 하고 ②치료법이 그 원인을 직접 겨냥하도록 설계돼야 한다. ③질병의 표적 물질에 약물이 작용했거나 유전자 편집이 성공했는지 입증해야 하며 ④같은 질환을 치료받지 못한 환자들의 경과 데이터가 축적돼 있어 대조군 역할을 해야 한다. ⑤증상 개선, 질병 진행 억제, 생물학적 지표 개선 등 치료 효과도 입증돼야 한다.
그래픽=박종범 기자
언뜻 까다로워 보이지만, 신약 개발 패러다임을 바꾸는 파격적인 조치다. 지금까지 신약 개발의 필수조건으로 여겨져온 '대규모 임상'이 빠졌기 때문이다. 치료가 왜 효과를 내는지 원리가 명확하고, 실제로 환자 상태가 개선됐다는 근거가 있으면 대규모 임상을 안 해도 허가를 내줄 수 있다고 공식화한 것이다. 유전자 치료와 리보핵산(RNA) 기반 치료제에 우선 적용되지만, 근본 원인이 명확하다면 다른 치료 방식으로도 확장 가능하다고 FDA는 설명했다.
생후 6개월 아기만을 위한 맞춤 치료
이 가이드라인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미국 아기 KJ 멀둔이다. 멀둔은 단백질 대사에 필수인 효소를 만들지 못하는 '카르바모일 인산 합성효소1(CPS1) 결핍증'을 갖고 태어났다. 초희소 유전질환이라 치료제가 없었다. 이에 미국 필라델피아 아동병원 연구팀은 멀둔만을 위한 유전자 가위 기술 '크리스퍼(CRISPR)' 기반 맞춤 치료제를 신속히 개발해 생후 6개월 차인 지난해 2월부터 투여했다. 이 치료제는 지질 나노입자에 실려 간으로 전달된 유전자 가위가 효소 결핍을 일으키는 특정 유전자 변이를 직접 교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를 사용한 환자는 멀둔 단 한 명뿐이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 AP 연합뉴스
이 약은 2023년 FDA 승인을 받은 크리스퍼 치료제 '카스제비'와 다르다. 카스제비는 겸상 적혈구 빈혈증이라는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 수십 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거쳤고, 불특정 다수를 치료하기 위해 개발됐다. 반면 멀둔의 치료제는 그의 고유한 유전자 변이에 맞춰 처음부터 새로 설계됐다. 비슷한 크리스퍼 기술이라도 카스제비가 '기성복'이라면, 멀둔의 치료제는 '맞춤복'인 셈이다. 당시 멀둔의 치료는 치명적인 질환을 앓는 환자에게 미승인 치료제 사용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FDA 제도를 통해 가능했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개별 사례에 그치지 않고 다른 환자들도 맞춤 유전자 치료를 정식 허가받을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고" vs "실제 허가 쉽지 않아"
과학계와 의료계에선 맞춤 치료제를 향한 기대감이 터져나왔다. 표도르 우르노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혁신유전체연구소 교수는 "이 가이드라인은 개인 맞춤 유전자 편집 치료 분야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신호"라며 "아이들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류 하버드대 화학·화학생물학과 교수는 "언젠가 유전자 편집 치료는 일반 수술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 회의적인 반응도 있다. 업계가 승인을 기대했던 희소질환 치료제 후보들에 FDA가 잇따라 제동을 걸었던 전례를 봤을 때, 가이드라인이 실제 허가로 이어지기 쉽지 않다는 여론이다. 이런 불신은 투자 심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인 맞춤 치료제 스타트업 '에브리원 메디신'은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주에 폐업했다. 창업자 줄리아 비타렐로는 "FDA에 대한 신뢰가 크게 부족하다. 투자자들이 믿지 않는다면 이 분야에서 회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FDA의 이 같은 움직임이 중국 견제용이란 시선도 있다. 중국도 의약품 심사 속도를 단축하기 위해 규제를 지속적으로 간소화하고 있다. FDA의 한 고위 관리는 미국 바이오 매체 피어스바이오테크에 "미국이 혁신을 선도하기를 바란다"며 "이 가이드라인 하나만으로 중국에 앞서기 충분하지 않으며, 많은 다른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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