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헌트릭스의 조이(왼쪽)가 든 무기는 무당이 귀신을 쓸 때 쓰는 신칼의 모티브를 따왔다 /이미지 넷플릭스
지난해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걸그룹 헌트릭스는 단순한 인기 아이돌이 아니다. 이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악귀를 물리친다. 수많은 관객이 함께 노래하고 호응하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악귀를 막는 ‘혼문’이 된다. ‘케데헌’은 노래와 춤으로 액운을 물리치고 공동체의 안녕을 빌었던 한국의 오래된 ‘굿’ 문화를 작품의 중심에 뒀다.
최근 굿은 대중문화에서 낡고 기괴한 미신이 아니라 동시대적이고 ‘힙’한 콘텐츠로 거듭나고 있다. ‘케데헌’보다 한 해 앞서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가 대표적이다. 무당 화림 역의 김고은이 벌이는 대살굿은 영화의 백미였다. 김고은의 춤과 몸짓, 이도현이 연기한 봉길의 북 연주가 어우러진 굿판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퍼포먼스 중 하나로 꼽히며 흥행을 견인한 명장면이 됐다.
굿이 동시대 콘텐츠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것은 그 자체가 가진 공연예술적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굿은 음악과 춤, 노래, 연기, 의상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관객 역시 수동적인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추임새를 넣고 춤을 추며 굿판을 함께 만들어간다. 연구자들이 현대 예술가들이 굿을 활용하는 이유로 ‘악가무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적 가치’를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케데헌’을 연출한 한국계 캐나다인 매기 강 감독 역시 지난해 기자들과 만나 “어떻게 보면 한국의 굿이 최초의 콘서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 파묘에서 김고은이 대살굿을 펼치는 장면/ 영화 스틸컷
굿 전면 내세운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오방색 옷자락 흩날리는 서울굿, 현대적 재해석
굿의 춤과 음악, 제의성은 특히 한국무용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 돼왔다. 서울시무용단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굿을 작품 전면에 내세웠다. 10~1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초연한 창작무용 ‘무감서기’다. 서울굿을 모티브로 굿이 가진 정화와 치유의 의미를 70분짜리 대형 무용 작품으로 재해석했다.
윤혜정 서울시무용단 예술감독은 굿을 종교나 미신이 아닌 우리 삶 속에 존재했던 문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조상들에게 굿과 무녀는 공동체 삶의 기초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무녀를 통해 사람들이 모이고 응집할 수 있는 정신적인 요소가 있었다”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천대받고 굿은 멀리해야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지만, 원래 굿은 우리 삶 안에 아주 일상적으로 존재했던 민속 중 하나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윤 단장이 주목한 것은 서울굿 특유의 ‘무감서기’다. 굿의 막바지에 굿을 의뢰한 사람이 무녀의 옷을 입고 음악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행위다. 진정한 복을 받으려면 자신이 직접 춤을 춰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울시무용단은 여기서 ‘복은 누군가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얻는 것’이라는 현대적인 의미를 끌어냈다. 인간이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들여다보고 다시 살아갈 힘을 스스로 찾는 과정으로 굿을 다시 읽은 것이다.
작품은 흑·황·청·적·백, 오방색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눈물’을 따라간다. 고통의 기억이 몸에 새겨진 ‘흑의 눈물’에서 출발해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고 분리해 바라보다 마침내 이를 분출하고 평온에 이르는 과정이다.
무대에는 무녀가 등장하고 굿의 무구인 방울과 부채도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전통 굿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무용수 45명의 대규모 군무와 음악, 영상이 굿의 정화와 치유를 현대적인 무대 언어로 바꿔놓는다.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공연 장면 / 제공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공연 장면 / 제공 세종문화회관
가장 강렬한 순간은 제3장 ‘적의 눈물’이다. 무대가 온통 붉게 물들고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억눌렸던 감정을 한꺼번에 터뜨린다. 마치 거대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듯 역동적인 이미지가 연이어 폭발하며 절정의 순간으로 치닫는다.
이어 ‘백의 눈물’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뀐다. 젊은 춤꾼 기무간이 지전을 형상화한 흰옷과 고깔을 쓰고 등장해 소리꾼 김율희의 라이브 소리에 맞춰 홀로 춤을 춘다. 전통 살풀이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독무를 통해 격렬했던 감정은 서서히 가라앉고 정화와 평온, 초월의 경지로 나아간다. 이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마지막 5장 ‘무감서기’에 이르면 오방색 옷을 입은 무용수가 다시 무대를 가득 채운다. 흩어져 있던 오방색의 몸들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합쳐지며 개인의 치유는 집단적인 해방의 난장으로 번져간다.
결국 ‘무감서기’가 말하는 치유는 초월적인 존재에게 기대는 구원이 아니다. 윤 단장은 “누군가가 나를 대신 구원해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내 눈물은 결국 내가 닦아야 한다. 관객들이 공연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작은 용기와 위로를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통과 동시대를 잇는 데는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진도 가세했다. 스무살 작곡가 이하느리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무용 공연 음악에 도전해 서울굿의 장단과 무구의 소리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장철수 감독은 미디어아트를 맡아 영화적인 이미지와 미장센을 무대에 입혔다.
공연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의상이다. 흑·황·청·적·백 오방색의 의상은 무용수들의 즉흥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따라 흩날리며 한국춤 특유의 유려한 선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민천홍 의상디자이너는 “무속의 모티브를 꺼내 정돈하는 과정에서 지전과 부적, 설위설경 등을 활용했다”며 “오방색과 더불어 다섯 가지 감정을 설명하는 과정이 의상에도 포함돼 있다. 특히 핵심인 무녀의 의상에는 오방색이 모두 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공연 장면 / 제공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무용단 무감서기 공연 장면 / 제공 세종문화회관
춤·노래·제의 어우러진 종합예술…K콘텐츠로 무궁무진한 변주 기대
다만 마지막에 등장하는 디지털 아트는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의도는 이해되지만, 전체 공연의 결과 이질적인 데다 메시지를 거칠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럼에도 ‘무감서기’는 굿을 과거의 민속이나 제의에 가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문화적 DNA로 이어가려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굿은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는 풍부한 문화적 자산이다. 앞으로 다양한 예술장르에서 굿이 가진 음악과 춤의 퍼포먼스적 요소와 희망과 치유, 공동체의 의미를 더 깊이 탐구하면서도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주한 작품들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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