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에 꽂히면 거짓말쟁이…어디에 포커스 두느냐가 중요
8명의 인물이 가진 각자의 외로움…‘내 이야기’ 같아서 공감
관객 해석에 맡기는 작품…11월1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스포츠서울 | 표권향 기자]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이 2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왔다. 2024년 초연 당시 김성규, 박강현 그리고 임규형 등 스타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아 일단 흥행 걱정은 놓았다. 사회불안장애를 앓는 학생이 스스로에게 쓴 편지가 동급생의 자살에 엮이지만, 이를 통해 소외와 단절, 고립된 이들에게 공감, 공동체의 회복과 위로를 건네는 작품으로써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하지만 작품은 한 거짓말쟁이의 이야기라는 것. 거짓말의 이유야 어떻든 이를 진실처럼 덮기 위해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지어내야 한다는 불편한 장면도 마주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넘버들이 거짓을 예쁘게 포장한다는 말도 나온다.
그렇다고 눈살만 찌푸리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디어 에반 핸슨’이다. 거짓말로 시작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지만, 결국 모든 이의 가슴에 ‘관심’과 ‘사랑’을 남긴다. 여기에 영화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작사·작곡가로 알려진 파섹 앤 폴의 아름다운 음악까지 입혀 불편한 진실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묘한 감정이 휘감긴다.
그래서 관람 후 반응은 철저하게 두 시선으로 갈린다. 거짓말한 것은 나쁘지만 결국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관종’이 아닌 ‘관심’의 대상에게 먼저 손을 뻗는 아름다움과 ‘선의의 거짓말’이지만 많은 이를 철저하게 속이고 이들의 관심을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다는 질책으로 나뉜다.
관객들의 온도 차가 심한데, 직접 ‘에반 핸슨’을 연기하는 배우는 어떻게 해석할까. 스포츠서울은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2시즌 연속 무대에 오르고 있는 뮤지컬 배우 임규형(33)을 만나 그의 해석을 담은 메시지를 들었다.
◇ 2년 만에 다시 만난 ‘에반’…초연과 달라진 포인트는?
임규형에게 ‘디어 에반 핸슨’은 낯선 작품에서 시작해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된 특별한 작품이다.
인연은 중앙대 공연예술창작학부 재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아리에서 여러 작품의 넘버를 섞은 랠리 공연을 준비했고, 그중 몇 곡이 ‘디어 에반 핸슨’이었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최소 3개월 후까지의 공연 티켓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작품이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했던 작품이었기에 처음부터 자신만의 해석을 입혀야했다.
오히려 그 점이 에반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됐다. 브로드웨이의 영상을 참고하면서 ‘킹카’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청소년의 느낌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 시간이 흘러 ‘디어 에반 핸슨’이 한국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오디션을 거쳐 실제 무대의 에반이 됐다.
초연 당시 가장 컸던 것은 부담이었다. 임규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반이 감정의 선을 놓지 않고 가야 한다는 걸 알고 나니까 부담이 컸다. 캐스팅을 알고 나서는 ‘내가 이끌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던 2년 전의 자신을 되돌아봤다.
하지만 연습을 거듭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 맡은 주인공이었지만 당시의 자신에게는 오히려 잃을 것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올라간 첫 공연은 긴장과 부담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공연이 끝난 후 다리가 풀리면서 눈물이 났다고 기억했다. 그를 찾아와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여러 감독들의 응원을 듣고 “참았던 감정이 터졌다”라고 그날을 떠올렸다.
2년 만의 재연은 같은 작품이지만 전혀 다른 출발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었다.
임규형은 “‘2년이 지났으니까 머릿속에 다 남아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라며 “초연 때는 내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것에 집중했다면, 재연은 그사이 여러 작품을 경험하면서 시야가 조금 넓어졌다. 이번에는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게 됐다”라고 말했다. 물론 무대 위 긴장감은 똑같다. 하지만 무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나 표현 방법이 다양해진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에반 자체보다 다른 인물들이 더 깊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에반을 보는 것보다 다른 캐릭터를 보는 깊이가 더 깊어졌다”라며 “같은 배우가 같은 작품을 두 번째 할 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확실히 다른 것 같다. 똑같이 할 수는 있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이 보이더라. 대본에서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다시 보였다”라고 설명했다.
◇ ‘호불호’ 바꾸려는 강요 No!…각자 어디에 ‘집중’하느냐의 문제
‘디어 에반 핸슨’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은 결국 에반의 거짓말이다. 임규형은 에반을 무조건 감싸지도, 반대로 단죄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관객이 작품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였다.
그는 “호불호(好不好)를 생각하면서 연기하지 않았다. 100명 중 99명이 좋아해도 한 명이 싫어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 한 명을 ‘호(好)’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 이유다. 이게 작품의 특성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에반의 행동만 떼어놓으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특히 에반이 자신의 거짓말을 털어놓은 이후의 장면을 강조했다.
임규형은 “에반의 행동에 꽂혀버리면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작품 전체를 보면 다른 부분도 있다. 거짓말이 나쁜 일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 일이 계기가 돼 다른 사람들의 결핍이 채워지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에반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이도, 다른 사람들도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조이가 과수원에 자주 가면서 조금씩 괜찮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그 사람들에게는 분명 큰 상처였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통해 어느 정도 치유받은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결국 중요한 건 ‘거짓말이 선한가’라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무엇을 보느냐는 것이다. 그는 “‘디어 에반 핸슨’은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에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에반의 행동도 결과적으로 좋게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며 “모든 분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의 매력이다”라고 강조했다.
◇ 음악 때문에 ‘왜’ 울고 있지?…이게 바로 ‘뮤지컬의 힘’
작품을 둘러싼 또 하나의 논쟁은 아름다운 음악이다. 거짓말과 자살, 가족의 단절과 외로움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파섹 앤 폴의 아름다운 선율이 감싸면서 때로는 불편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미화(美貨)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임규형 역시 이 지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생각하는 뮤지컬의 힘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뮤지컬이다 보니까 중간중간 드라마도 많지만, 노래가 너무 아름답다. 그래서 이야기가 예쁘게 포장된다고 느끼실 수도 있다. 하지만 가사 안에도 이야기가 들어 있다”라고 소개했다.
관객의 반응에서 음악의 힘을 실감한다는 임규형은 “처음에는 작품을 안 좋게 보시던 분들도 어느 순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결국 다 보게 되는 것이다. 음악이 울컥하게 만들어서 ‘내가 왜 울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라고 공감했다.
그 순간 관객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이 들어오면 ‘나도 뭐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된 건가? 공감이 된 건가?’라는 물음표를 스스로 던지게 되는 것 같다. 내용 전체를 잘 몰라도 노래 하나 때문에 울컥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게 음악이 주는 힘인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디어 에반 핸슨’의 음악이 밝게 느껴지는 것에 대해 “확실히 ‘디어 에반 핸슨’은 괜히 희망차고 밝은 이야기만 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런데 음악은 밝다. 그 대비가 있는 것 같다”라고 강조했다.
◇ 8명 모두에게 있는 각자의 결핍…과수원 이후 이들의 삶은?
임규형이 재연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시선은 바로 에반만 바라보지 않게 됐다는 것. 작품 속 인물 8명 모두에게 각자의 외로움과 결핍이 있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됐다. 인물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관객마다 초점을 맞춘 인물에게 공감하고 마음이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객석에 있는 관객들에게 8명의 인물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정서와 맞닿는 지점도 바라봤다. 임규형은 “요즘 세상이 굉장히 각박하지 않나. 갈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이 있는 것 같다”라며 “‘디어 에반 핸슨’을 단순한 힐링극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조심스럽다”라고 강조했다.
대신 관객이 공연장을 나갈 때 자신의 외로움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관람 후 외로움이 조금은 해소될 수도 있다. 나와 같이 느낄 수 있는 인물이 무대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임규형이 생각하는 ‘디어 에반 핸슨’의 힘은 관객에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대놓고 ‘여러분에게 힘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작품은 아닌 것 같다. 각자가 알아서 얻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관객의 해석이 모두 달라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그는 “장면마다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분은 에반의 거짓말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분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결핍이 채워지는 걸 볼 수도 있다”라고 전했다.
임규형이 생각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결핍과 외로움 속에서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가깝다. 치료나 치유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기보다, 관객이 각자 보고 느끼면서 얻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 역시 그 힘을 얻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연이 끝난 뒤 에반은 어떻게 살아갈까. 임규형에게도 답은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평소와 같이 살아갔을 수도 있고, 어떤 힘을 얻어서 조금 더 나아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 열린 질문이 ‘디어 에반 핸슨’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분명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 잘못만으로 에반의 모든 시간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에반을 통해 거짓말의 무게를 보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외로움을 발견한다. 또 누군가는 아름다운 음악 한 곡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임규형이 다시 에반의 무대에 서는 이유도 어쩌면 그 지점에 있다. 같은 대본, 같은 넘버, 같은 결말이어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다 보고 난 뒤, 관객 스스로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는 것이다.
임규형은 관객들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객석에 있는 각자의 몫이라는 ‘디어 에반 핸슨’은 오는 11월 1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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