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미(한국로슈진단 전무)
[라포르시안] 오랫동안 의료기기 인허가는 눈에 보이는 의료 제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규제당국에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의료기기법·체외진단의료기기법에 따라 하드웨어의 전기·기계적 안전성을 점검하고 재료의 생물학적 안전성을 따지며 체외진단 시약의 분석적 임상적 성능을 증명하는 것이 업무의 본질이었다.
규제당국이 요구하는 서류의 근간에는 늘 만질 수 있는 의료 장비와 손에 잡히는 시약이 존재했다. 기준규격과 가이드라인 역시 역사가 깊어 요건을 참고할 자료가 풍부했고, 경험 많은 전문가도 많았다. 하지만 인공지능(AI)·로봇과 같은 디지털 기술은 산업 전반을 넘어 우리의 일상을 많은 면에서 바꿔 놓았다. 삶에 도움을 주는 로봇과 생성형 AI가 주는 신세계를 경험한 이들은 그 가치를 인정하고 기꺼이 구독료를 지불하며 기술을 수용하고 있다.
첨단 의료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의료기기는 ▲생성형 AI ▲머신러닝(ML) ▲클라우드 데이터 ▲디지털 융복합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으로 의료 환경에 속속 진입하고 있다. 바야흐로 소프트웨어가 자체적으로 의료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결합해 최적의 치료 결정을 돕고 질환 위험성을 예측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하드웨어 중심의 사고를 넘어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얼마나 빠르게 습득하고, 이를 ‘규제의 언어’로 이해해 반영해 낼 수 있느냐에 있다.
올해 3월 발표된 ‘제1차 디지털 의료제품 안전관리 1차 년도 시행계획’은 규제전문가들에게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디지털 대전환을 선도하는 혁신 규제와 과학적 안전망 구현’을 비전으로 발표하며 기존의 통합적 관리에서 나아가 디지털 의료제품만의 특성을 반영한 전용 안전관리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디지털의료제품법 시행 이후 의료 제품을 바라보는 시각이 하드웨어 중심에서 AI 및 소프트웨어의 고유한 특성을 고려한 규제 패러다임으로 완전히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디지털 의료제품의 성공적인 시장 진입을 위해서는 개발 전주기에 걸쳐 ‘RAQA’(Regulatory Affairs & Quality Assurance·규제 및 품질전문가)의 다각적인 역량이 요구된다.
여기서 말하는 역량은 결코 독자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규제 및 품질전문가는 엔지니어, 보안·IT 전문가, 임상 전문가들과 긴밀히 협업하며 규제적 타당성을 확보해 나가는 ‘전략적 규제전문가’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고민하는 ‘디지털 규제전략가’로서 앞으로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첫째 설계·개발 단계에서의 ‘규제 가이드’ 역량이다. 디지털 제품 역시 초기 단계부터 규제 요건이 반영되지 않으면 추후 임상을 비롯한 설계 변경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RAQA는 엔지니어와 개발자가 구현하려는 기술이 의료기기 정의에 부합하는지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개발자가 의도하는 업데이트 범위를 규제 해석을 통해 승인 가능한 전략으로 도출해 내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생성형 AI 의료기기의 인허가, 임상 평가, 변경 관리 계획(PCCP)과 관련한 세부 가이드라인이 마련될 예정인 만큼 이에 대한 역량 강화가 요구된다.
둘째 품질·보안 체계 구축에서의 ‘통합 관리’ 역량이다. 사이버 위협에 대비한 전자적 침해 대응 시스템 구축과 SBOM(Software Bill of Materials·소프트웨어 구성요소 전체 목록) 관리는 더 이상 보안·IT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RAQA는 이들 전문가와 협력해 기술문서가 식약처 가이드라인을 충족하는지 검증하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보안 취약점에 대한 사후 관리 프로세스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소프트웨어에 특화된 품질관리(AI GMP) 시스템을 조직 내에서 규정에 맞게 절차화하고, 해킹 등 전자적 침해행위나 취약점 발생 때 정부·의료기관·기업이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체계로 작동하도록 관련 부서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셋째 임상·성능 검증 단계에서의 ‘과학적 소통’ 역량이다. 디지털 제품의 임상 평가는 기존과 결이 다르다. RA는 임상 전문가와 협력해 실사용 데이터(RWD) 등이 인허가 과정에서 유효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도록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또한 생성형 AI처럼 결괏값이 가변적인 제품은 임상적 안전성을 입증할 평가 지표를 규제당국에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제시하고 타당성을 확보하는 중재자 역할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인허가 획득·사후 관리 단계에서의 ‘글로벌 규제 이해’ 역량이다.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다면 국내 기준을 넘어 국제 표준(ISO·IEC)을 설계 단계부터 반영해야 한다. RAQA는 글로벌 규제 동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이를 조직 내 공유함으로써 전 세계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품질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와 성장이 개별 기업이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기는 요원한 일이다. 이 때문에 정부 역시 디지털 규제과학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과 밀착 지원을 계획하고 있으며, 산업계의 적극적인 참여도 필요하다.
식약처 계획서에 명시된 ‘AI 레드팀 실전형 보안 점검’이나 물리적 회수가 어려운 소프트웨어 특성을 반영한 전자적 사후 조치 수단인 ‘원격 기능 잠금’(Lock), ‘강제 보안 업데이트’ 등은 아직 의료 현장에서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따라서 실무 중심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산업계로 유입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은 의료기기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과정에서 맞이한 중요한 기회다. 디지털 의료제품에 대한 새로운 관리 체계를 구체화하고 있는 지금, 디지털 역량 강화는 단순히 인허가를 통과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규제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현장에 적용함으로써 제품 안전성을 확보하고 사용자에게 신뢰를 제공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결국 디지털 시대의 의료기기 규제는 ‘설계’에 가깝다. 규제는 제품이 완성된 이후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에 내재돼야 한다. RAQA는 그 중심에서 법규 해석 능력에 제품 개발 메커니즘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더 해 조직 내 다양한 전문가들이 규제라는 기준 내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돕는 ‘전략적 조율자’가 돼야 한다. 이러한 역량 강화는 더 발전된 디지털 의료제품이 의료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필수적인 과정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라포르시안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