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최근 인공지능(AI)은 지식 노동 전반에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보고서와 코드 작성, 계약서 검토,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업무에서 AI 활용이 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앤트로픽 클로드(Claude) 같은 ‘AI 에이전트’ 도구가 데스크톱 환경에서 복잡한 업무 흐름을 학습해 작업 전체를 수행하고 있다. 예컨대 기업의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에서 비용 정산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계약서를 작성· 검토하는 작업까지 자동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두고 일부에서는 AI가 지식 노동을 대규모로 자동화하고 소프트웨어 기업과 전문 서비스 산업을 크게 흔들 것으로 전망한다. 거의 모든 산업이 영향받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식 노동이 AI 도구 설계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실제로 AI가 기업 수익성에 미치는 효과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 골드만삭스 연구에 따르면, 2025년 미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AI 투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경제성장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AI가 지식 노동의 가치 창출 구조를 정확히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성과 모호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술의 의미와 전략적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비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유는 익숙한 개념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게 해 주며 전략적 판단을 단순화하는 힘이 있다. 1950년대 초기 전자식 디지털 컴퓨터가 등장했을 때 일부 사람은 이를 인쇄술에비유했다. 인쇄술이 인간 사고와 지식 전달 방식을 바꾼 것처럼 컴퓨터 역시 새로운 사고의 매체가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이후 애플이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애플의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 역시 컴퓨터를 인간 사고의 새로운 매체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탄생했다.
톰 스타인버거 - 한국과학 기술원 기술경영학부 교수, 미국 듀크대 역사학, 연세대 국제경영학 석사,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UC 어바인) 전략경영학 박사
AI는 새로운 전기’라는 실리콘밸리, 한국에는 불리한 말
그러나 비유가 항상 도움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잘못된 비유가 전략적 판단을 오도하기도 한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를 ‘더 빠른 마차’로 이해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비유 때문에 초기 자동차 설계에는 채찍을 꽂아두는 거치대가 포함되기도 했다. 새로운 기술을 기존 개념에 지나치게 맞추려다 보니 잘못된 설계가 이뤄진 것이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널리 사용되는 비유는 ‘AI는 새로운 전기’라는 주장이다. 전기가 산업 현장에서 증기기관을 대체하며 공장 구조를 바꾸고 조립 라인 기반의 대량생산 체계를 만든 것처럼 AI도 지식 노동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의미다. 이 관점에서는 AI가 기존 업무를 단순히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지식 노동의 전체 업무 흐름을 재설계할 것으로 기대한다. AI 에이전트를 활용해 업무 과정을 모듈화하고 이를 대규모로 처리하는 ‘AI 공장(AI factory)’이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이런 논리에서 나온다.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은 이러한 개념을 통해 AI 기반 지식 노동이 대량생산 체계로 전환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는 한국 같은 국가에 전략적으로 불리한 말일 수 있다. 전기 기반 산업이 대규모 공장과 설비투자를 중심으로 발전했듯이 AI 산업에서도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서버 인프라를 구축한 기업이 경쟁 우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글, 바이두 같은 대형 기술 기업이 막대한 투자를 통해 데이터센터와 AI 칩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는데, 이런 기업은 ‘하이퍼스케일러(AI용 대규모 데이터센터 운영 업체)’로 불린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한국 기업이 메모리 반도체나 특정 산업 분야의 AI 응용 같은 틈새시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과 같다. 물론 이 분야 역시 충분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하이퍼스케일러가 창출할 것으로 예상되는 막대한 시장 규모와 비교하면 제한적인 기회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최근 소프트웨어 서비스 기업 시장 가치가 하락한 사례는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보여준다.
AI를 전기에 비유하는 관점 자체가 지식 노동의 본질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산업 생산은 작업을 세분화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반복 수행하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 반면 지식 노동은 다양한 작업에서 생성된 정보를 통합해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고 의사 결정하는 과정이다. 보고서나 이메일을 대량으로 생성한다고 해서 지식 노동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한 자동화는 조직의 의사 결정 과정을 더 복잡하고 관료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한국은 ‘응용 AI(applied AI)’ 전략을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에서 AI 활용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하이퍼스케일러의 틈새 역할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은 반도체 기술, 산업 기반, 기술 인재 그리고 전략적 정책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새로운 엑셀, 더 큰 생태계 적응해야
AI를 이해하는 더 적절한 비유는 ‘새로운 엑셀(Excel)’일 수 있다. 엑셀이 등장했던 1980년대에 많은 사람은 이를 단순한 자동 계산 도구로 보았다. 그러나 엑셀은 단순히 수치 계산을 자동화하는 것을 넘어 지식 노동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투자은행 분석가가 장시간 엑셀 모델링을 수행하는 문화가 등장한 것도 이러한 변화의 결과다. 작업효율성이 높아지자, 오히려 해당 업무 수요가 더 늘어나는 ‘제번스의 역설’이 나타난 것이다.
AI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AI 에이전트 도구는 다양한 지식 노동 작업을 자동화해 효율성을 높일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가치 창출은 단순한 자동화보다이러한 도구가 더 큰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는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엑셀 자체보다 오피스 소프트웨어 패키지와 운영체제 전략을 통해 가치를 확보한 것처럼 AI 역시 더 큰 기술 생태계 속에서 경쟁력이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AI 전략은 단순히 하이퍼스케일러를 보완하는 틈새 역할에 머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큰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략을 고민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비유는 애플의 전략이다.
1990년대 애플의 ‘Think Different’ 캠페인은 컴퓨터를 단순한 계산 기계가 아니라 인간 사고를 확장하는 도구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애플의 매킨토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통해 문서와 데이터 간 관계를 직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작업 환경을 제공했다. 이는 컴퓨터를 단순한 업무 도구가 아니라 지식 노동의 창의적 작업 공간으로 재정의한 전략이었다.
미래의 AI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AI는 단순히 업무를 자동화하는 공장이 아니라 복잡한 지식과 데이터를 시각화하고 재구성하는 인터랙티브 작업 공간이 될 수 있다. 사용자는 AI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조작하며 복잡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은 ‘응용 AI(applied AI)’ 전략을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에서 AI 활용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하이퍼스케일러의 틈새 역할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한국은 반도체 기술, 산업 기반, 기술 인재 그리고 전략적 정책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AI 전략은 단순히 하이퍼스케일러의 생태계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AI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단순히 새로운 지식 노동의 엑셀을 만드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고를 제시하는 AI 시대의 애플’을 만드는 전략이 돼야 할 것이다.
톰 스타인버거 한국과학 기술원 기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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