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딛고 사회복지사로 재기한 노영호 집사
노영호(오른쪽)씨와 어머니 김종말 권사가 최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후 환하게 웃고 있다.
“하나님을 만난 뒤 제 삶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185㎝의 건장한 체격에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촉망받던 직장인 노영호(53)씨는 24년 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삶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극단적 선택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중증 시각·뇌병변 장애였다. 하지만 절망의 끝에서 만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지난 3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하며 새로운 소명의 길에 들어선 노씨 곁에는 아들을 눈물과 기도로 지켜온 어머니 김종말(83) 권사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픔을 극복한 노씨는 이제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나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상황을 고려해 서면 답변을 바탕으로 하고, 현장에서 어머니가 보충 설명을 더했다.
장애 뛰어넘은 도전
노씨는 자유롭지 못한 두 손과 시력을 잃은 중증 장애를 딛고 지난 3월 사회복지사 1급 시험에 합격했다. 축하 인사를 건네자 그는 “반복과 간절함이 만든 결과”라며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하며 교안을 녹음해 빠른 속도로 듣는 속청법으로 핵심을 파악하고 기출문제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도전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사회복지사는 신앙 안에서 발견한 소명이었다. 그는 “매주 설교를 녹취하고 정리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던 중 기도를 통해 비전을 주셨다”며 “무엇보다 장애인도 전문성을 갖추면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음을 직접 증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엘리트로 살아온 삶 속에서 장애를 저와 상관없는 타인의 일이라 여겼고 편견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천적 장애인이 되고 나서야 그분들이 견디는 삶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는 사회가 선망하는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그러나 찬란했던 청춘은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으로 무너졌다. 후천적 장애를 얻게 된 발단은 20여 년 전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이라는 참혹한 비극이었다.
사내 왕따로 멈춰 버린 삶
노씨가 20대 시절 경기도 의정부 종합운동장에서 사이클 영웅 엄복동 선수 동상 앞에서 찍은 모습. 노씨 제공
노씨는 1972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마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카투사(주한미군 한국군 지원단) 복무 시절 미 육군 공로 훈장(ARCOM)을 받을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다. 1999년 1월 한 대기업에 입사해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본사로 발령받을 때만 해도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비극은 믿었던 고향 선배와 동료들의 따돌림에서 시작됐다.
김 권사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별거 아니네’라는 폭언과 공개적인 망신이 일상이었고 사표조차 반려당한 채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다”며 “아들은 모든 게 부족한 제 탓이라 여기며 버티다 결국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홀로 고통을 견디던 노씨는 2002년 8월 끝내 음독을 시도했다.
몇 주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인 끝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으나, 심각한 뇌 손상으로 시신경과 운동·언어 신경이 마비되는 중증 장애를 입었다. 깨어난 노씨는 가족을 향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절규했다. 자신 때문에 무너진 가족을 지켜보는 것이 장애보다 더 큰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김 권사는 “늘 자랑이던 막내아들의 청춘이, 세상이 그렇게 멈춰버렸다”며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아들을 보며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현대의학이 포기한 상황에서도 가족들은 결코 손을 놓지 않았다. 한의사인 누나는 한방 치료를 이어갔고 한약사인 형은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며 치유에 전념했다. 이러한 지극정성 덕분에 노씨는 어눌하게나마 말문을 틔웠고 스스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구치소서 만난 하나님
김 권사가 2004년 1인 시위 도중 부상을 입어 민주노총 건물 복도에서 깁스를 한 채 앉아 있는 장면. 노씨 제공
아들이 조금씩 회복될 기미를 보이자 김 권사는 남편과 함께 ‘내 아들을 살려내라’는 손팻말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2003년 1월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아들이 근무했던 회사와 검찰청 앞을 지켰지만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김 권사는 “산업재해가 인정되지 않으면 가족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에 고심 끝에 소복을 입고 시위에 나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시위를 이어가던 중 김 권사는 현수막 철거를 막아서다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위기도 겪었다. 그러나 절망적인 그곳에서 기이한 꿈을 꿨다. 김 권사는 “예수님이 나타나 시위 때 타던 차량 열쇠를 건네며 ‘오늘 석방될 것이니 운전 조심하고 아들 문제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했다.
“평소 불교와 무속 신앙에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네’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날 구치소 수감 20일 만에 기적적으로 석방됐습니다.”
이후 김 권사는 인터뷰로 인연을 맺은 방송사 PD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마주한 따뜻한 교회 공동체의 환대는 그를 신앙의 길로 인도했다. 김 권사는 “때로는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울부짖기도 했지만 결국 절망의 끝에서 마지막으로 붙들 곳은 하나님뿐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평생 지켜온 제사까지 내려놓은 김 권사의 전도로 노씨도 신앙을 갖게 됐다. 모자를 향한 공동체의 간절한 중보 기도가 이어지던 중 마침내 2006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노씨는 현재 집사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김 권사는 “아들의 고통이 사회적 비극이었음을 국가가 확인해 준 순간은 우리 가족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했다.
노씨 역시 삶의 고비마다 곁을 지켜준 이들이 모두 신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회상한다. 특히 교회 청년들은 시각장애가 있는 그의 손발이 돼 컴퓨터와 스마트폰 활용법을 끈기 있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기록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갈수록 나를 짓눌렀던 부정적인 생각의 사슬이 끊어지고 그 자리가 감사와 긍정으로 채워졌다”며 “비록 육신에 장애가 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나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는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로 부여받은 소명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노씨는 이제 지역 교회와 협력해 NGO 사회복지단체를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다. 그는 “영유아 보육부터 청소년 진로 상담, 다문화 및 장애인 복지까지 아우르는 복음 복지에 헌신하고 싶다”며 “특히 경영학 전공자의 안목을 살려 실질적인 청소년 취업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중도 중증 시각·뇌병변 장애라는 한계를 스스로 극복한 경험도 적극적으로 나눌 예정이다. 노씨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장애인이 소외되지 않도록 AI와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자기 주도 학습법을 전수하려 한다”며 “이를 통해 더 많은 장애인이 세상에 도전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노씨는 2019년 자신의 치열한 생존 기록을 책으로 펴낸 바 있다. 현재는 후속편을 집필하고 있다. 이는 자신처럼 이 땅 어딘가에서 홀로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노씨는 “개인을 표적 삼은 집단 폭력은 영혼을 파괴하는 잔혹한 행위임을 우리 사회가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절망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과거의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노씨는 나직하지만 굳건한 위로를 전했다.
“죽을 만큼 힘든 순간도 결국은 지나갑니다. 고난 가운데 있다면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그 끝에는 반드시 당신만의 위대한 인생 작품이 완성될 것입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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