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댕 유치원' 변화 이끌었던 이지현 PD
'어른·대본·정답' 뺀 어린이 철학 토론 선보여
EBS 어린이 철학 프로그램 '어린 철학자'의 한 장면. EBS 제공
지난달 4일 첫 방송한
어린이 철학 토론 프로그램 EBS ‘어린 철학자’
에는 세 가지가 없다.
진행을 이끄는 안전장치인 성인 출연자가 없고, 아이들이 미리 외워 와야 하는 대본도, 꽉 닫힌 결론도 없다.
‘3무(無) 원칙’ 아래 사유의 장으로 들어온 초등학생들은 정답이 없는 철학적 주제를 놓고 자유롭게 질문하며 의견을 나눈다.
EBS 역사상 가장 날것의, 파격적인 어린이 프로그램을 시도 중인 사람은 이지현 PD. 3년간 ‘딩동댕 유치원’을 통해 다문화 가정의 마리, 자폐 아동 별이, 조손 가정의 조아 등 다양한 서사를 가진 어린이를 소개하고, 변화해야 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짚어냈던 베테랑 연출가다. 어린이 철학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오랜 꿈이었다는 이 PD를 15일 경기 고양시 EBS 사옥에서 만났다.
"'철학 하는 힘'도 조기교육을"
'어린 철학자' 6화에서 권위자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옳은지, 자율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엄마 말 안 듣기 게임'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 EBS 제공
이 PD는 “
철학이야말로 조기 교육과 오랜 반복 학습이 필요한 학문
”이라며 “
질문하는 감각이 죽지 않고 깨어 있어야 주관과 소신을 가질 수 있고, 나중에 사회에서 부당한 일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스페인 작가 엘렌 두티에의 ‘왜 하면 안 돼요?’가 출발점이 됐다. 강렬한 일러스트 옆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채워진 어린이 철학책이다. 집에서 초등학생 딸·아들과 문답을 나누며 이 PD는 “어린이도 철학 할 수 있어!”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지난해 이를 슬로건 삼은 기획안을 사내 공모전에 제출해 당당히 당선됐다.
편당 9분 안팎의 어린 철학자는 매회 동화책을 옮긴 듯한 애니메이션으로 짧고 굵게 화두를 던지고, 스튜디오에서 아이들끼리 벌이는 토론을 생생하게 담은 뒤 열린 결말의 애니메이션 에필로그로 닫는다. 애니메이션은 스토리부터 제작까지 100% 새로 만든 창작물이다. 도입부는 녹화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미리 만들지만 마지막 에필로그는 토론을 지켜본 뒤 추가로 작업한다. “열린 결말이라도 아이들의 마지막 발언과 연결하고 싶었어요. 그때그때 토론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번거롭더라도 두 번씩 작업하기로 했죠.”
"아이들 통찰에 어른도 배워"
'어린 철학자'를 기획하고 연출한 이지현 PD. EBS 제공
6개월의 준비 기간 회의와 학술 자문을 거쳐 나와 타인의 생존 딜레마를 다룬 ‘감옥 탈출’, 공평과 공정의 의미를 짚는 ‘아이템 나눔합니다’,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명, 변기’ 등 철학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에피소드와 질문을 완성했다. 녹화 중 가벽 뒤에서 아이들의 토론을 관전한 스태프들은 “애들이 우리보다 낫다”는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 인간의 쓸모’를 묻는 질문에 한 아이가 “나는 살아있고 뭐든지 할 수 있어. 그게 내 쓸모야”라고 했을 땐 무릎을 탁 쳤다고. 이 PD는
“아이들의 해맑은 답변이 인간으로서 근본과 본질을 확 찌르는 순간이 있다”
며 “아이를 미성숙하고 수동적인 존재로만 인지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바뀌도록
이런 목소리를 세상에 계속 들려주고 싶다
”고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든 도구인 AI가 아이들의 미래를 잠식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게 이 PD의 바람이다. 그는 “AI에게 질문하는 힘, 결과값을 통찰하는 힘, 또 확고한 기준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설계하는 힘을 키워주는 교육이 철학”이라며 “많이 돌아가는 험한 길이 될지라도
어린 철학자를 통해 ‘주입식 정답 찾기’ 교육에서 경로를 이탈하고 싶다
”고 말했다. 요즘엔 어린이날 주간 방송을 목표로 ‘AI 특집 3부작’도 준비하고 있다.
“애들은 몰라도 돼”라는 말로 덮어둔 이야기는 모두 이 PD의 소재다.
딩동댕 유치원에서의 실험이 그랬고, 이번 철학 프로그램도 그렇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고 이 PD는 말했다. “우리나라 어린이 프로그램은 보수적이고 정체돼 있어요. ‘어린이들이 이런 것까지는 알 필요 없어’라는 생각 때문이죠. 다음에는 성교육과 학교폭력, 아동 학대 같은 이야기도 어른이 아닌 아이들 대상으로 제대로 다뤄보고 싶어요.”
EBS '어린 철학자' 포스터. E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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