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현지 시간) 열린 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왼쪽) 취임식에서 발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자본주의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수요에 불이 붙으면 기업이 다퉈 투자에 나서고 이윽고 생산 설비는 남아돈다. 수요는 점차 가라앉고 약한 기업은 퇴출된다.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통해 설비가 줄어들고 새로운 호황을 기다린다.
길게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3년 오일 쇼크까지가 공전의 호황이었다. 경제 환경이 안정되고, 억눌렸던 투자가 재개됐다. 자동차가 대중화됐고, 반도체·컴퓨터로 대표되는 정보기술(IT) 혁명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다.
폐허가 됐던 독일과 일본의 제조업이 재건되면서 세계 경제는 투자 과잉으로 인한 이윤율 하락을 겪게 된다. 오일 쇼크는 추세를 가속화했을 뿐이다. 미국의 대형차는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철강과 반도체에서도 일본에 밀리기 시작한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가치를 급락시켜 제조업 부흥을 도모했다. 일본은 ‘자율적 수출 규제’를 통해 협조했고 미국 제조업은 다시 회복한다. 1995년 4월 엔화 가치가 달러당 79엔까지 올라가자 미국은 역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절상으로 전환한다.
미국은 고금리 정책을 통해 해외 자금을 흡수했고 제조업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소련의 붕괴로 인한 미국 일극 체제 성립이 계기가 됐을 것이다. 미국은 제조업 대신 금융을 선택했고 금융의 규제 완화가 병행됐다.
주가는 거침없이 올랐고 1990년대 IT 혁명이 뒷받침했다. 2001년 IT 버블이 꺼지자 미국은 부동산 경기 부양을 통해 회복을 시도했다. 부동산에 대한 대출은 증권으로 변형돼 유통됐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자 금융 거품도 덩달아 꺼지고 세계는 유례없는 금융 위기를 겪게 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라는 비상 조치를 동원해 위기를 극복했다. 몇 년간 불황을 거쳐 미국 경제는 회복됐지만 질적으로 변화했다. 투자가 아니라, 주식·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한 상류층 소비에 의존하는 구조가 자리잡았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경제가 금리에 매우 민감해졌다. 연준 의장의 입 모양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그에 따라 주가가 등락을 거듭했다. 코로나19로 양적완화가 더 거대한 규모로 시행되고 막대한 재난지원금이 풀리자 자산뿐 아니라 일반 상품·서비스 가격도 상승했다. 인플레이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코로나19로 급락·급등을 거친 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2%대에 머물고 있으며 그것도 점차 하락하고 있다. 지난해 성장률은 2.1%에 불과하다. 연준이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수하면서 2024년 9월부터 기준금리를 낮추고 있음에도 그렇다. 그사이 금리는 5.5%에서 3.75%까지 하락했다.
명백히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인플레이션과 불황)의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인공지능(AI) 붐에 따라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센터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이들 중심으로 주가가 오르면서 겉으로는 호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화장을 지우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이란 전쟁은 세계 경제에 망치질을 하며 스태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경제 전망을 수정해 세계 경제성장률은 3.3%에서 3.1%로 낮추고, 물가상승률은 3.8%에서 4.4%로 올려 잡았다.
전 세계 석유 해상 운송의 27%를 차지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유가는 거침없이 오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은 종전 협상에 나서고 있으나 어느 한쪽도 크게 양보하기 어렵다. 석유와 가스 가격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석유를 원료로 하는 화학 제품 가격도 같이 오른다. 석유 정제시 나오는 나프타는 플라스틱과 비닐의 원료가 된다. 비료를 만드는 데도 석유가 필요하다. 비료가 부족해지면 식량난이 찾아온다.
미국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 동기 대비 3.8%로 2023년 5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CPI 상승률은 2022년 6월 9.1%를 피크로 점차 내려오는 추세였으나 다시 상승 추세로 반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연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금리를 올리면 불황이 본격화될 수 있다. 지금 빅테크는 물론 상당수 IT 기업들이 AI 관련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며 회사채는 물론, 사모펀드의 대출도 사용되고 있다. 금리 인상은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면서 모처럼의 투자 붐을 냉각시킬 수 있다. 자칫 부도라도 나고 환매 사태가 벌어지면 경기는 급랭할 것이다.
그렇다고 금리를 내리자니 인플레이션이 고민된다. 금리를 내린다고 투자가 늘고 경기가 급속도로 상승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제조업과 투자 비중이 낮은 나라다. 반대로 주식·부동산·원자재에 대한 투기 붐을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유가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경제의 다른 분야로 확산돼 연쇄적인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자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는 중산층 이하 가계에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는 정치적 불만으로 표출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에게 먼 산 불구경이 아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94%에 이르고, 원유의 70%를 중동에서, 그 중 62%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이란 전쟁 최대의 피해자다. 석유에 대한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전략비축유를 방출해 겨우 충격을 완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되면 이런 정도로 감당하기 어렵다.
이미 경제성장률은 장기적으로 하락 추세다. 2010년대까지는 그럭저럭 3%대를 유지했지만 2020년대 들어 2%대로 추락하고 지난해에는 1%에 그쳤다. AI에 따른 반도체 붐에 가려져 있지만 저성장 구조에 들어간 것이다.
CPI 상승률은 최근 들어 상승 추세로 돌아섰고 지난 4월 전년 동기 대비 2.6%에 이르렀다. 이란 전쟁의 상황을 볼 때 쉽사리 내려갈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역시 스태그플레이션의 초입에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AI 투자 경쟁은 수익성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치킨 게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연준의 금리 인상은 찬물을 끼얹을 수 있고 반도체 경기도 빠르게 식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꼬일 것이다. 모처럼의 증시 붐이 가라앉고 정부는 다시 부동산 경기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눈 앞의 성취 뒤에 펼쳐질 전망을 내다봐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것은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충격을 줄이려면 다각화가 필수적이다. 석유·가스에 대한 중동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 시급하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속도도 높여야 할 것이다.
수출 시장도 미국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화해야 할 것이다. 관세와 이란 전쟁 모두 미국에서 시작됐다. 최근 들어 미국의 정책은 예측하기 어려우며 일관성이 없다. 작은 이익에 흔들리면 안 된다. 최대한 다변화하면서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적응할 수 있는 중간 지대를 찾는 것이 당면 과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인호 객원기자 yourinho@naver.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