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국립전주박물관이 지난 15일 서고사 나한상의 역사와 제작기법 등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문헌과 구전으로 살펴본 서고사의 역사부터 나한상의 제작기법과 안료 성분 분석까지 모두 6개 주제의 발표가 진행됐다.
최근 확인된 발원문을 통해 제작 시기가 1695년으로 밝혀진 나한상의 역사적·미술사적 가치를 살펴보고, 컴퓨터단층촬영 등 과학적 조사 결과도 공유했다.
발표는 모두 6개 주제로 진행됐다.
허문행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문헌과 구전으로 살펴본 서고사의 역사’, 선유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전주 서고사 범종의 조성과 양식적 특징 고찰’, 강건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전주 서고사 나한상에 대한 소고’, 양석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CT를 활용한 전주 서고사 나한상의 제작기법 연구’, 박승원 국립전주박물관 학에연구사의 ‘전주 서고사 나한상 복장 후령통 연구’, 박진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전주 서고사 나한상에 사용된 안료의 성분 분석가 바로 그것이다.
각 발표에는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토론자로 참여해 연구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다.
문헌과 구전으로 살펴본 서고사의 역사에는 최우중(전주시청)이, 서고사 범종 연구에는 조충현(단국대학교 교수)이, 나한상 연구에는 조태건(불교문화유산연구소)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또, CT를 활용한 제작기법 연구에는 송정일(문화유산보존과학센터), 복장 후령통 연구에는 양희정(국립중앙박물관), 안료 성분 분석에는 고수린(국립광주박물관)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종합토론은 송은석 동국대학교 교수가 좌장을 맡아 진행, 서고사 나한상의 역사적·미술사적·과학적 성과와 가치를 폭넓게 논의했다.
박경도 국립전주박물관장은 “이번 학술대회가 전북특별자치도 성보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역사·문화를 공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앞으로도 우리 지역의 성보문화유산을 조사·연구, 이를 관람객과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조사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 허문행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문헌과 구전으로 살펴본 서고사의 역사’
황방산(黃方山) 서고사는 오랫동안 전주를 지켜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역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서고사는 후삼국시대인 908년 명덕(明德) 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견훤(867~936)이 도성인 완산주를 지키기 위해 동서남북에 진(鎭)을 설치하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진마다 각각 비보사찰을 두었다. 서고사도 그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서고사는 고려시대 혜공(惠空)스님이 조선시대에는 지엄(智嚴) 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한다. 동고사 ·남고사 · 북고사(진북사)와 함께 전주를 수호하는 4대 사찰로 일컬어져 왔다.
서고사는 오랜 역사에 비해 그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적게 남아 있다. 오늘날 사찰에는 창건과 중창의 과정을 기록한 사적기(事蹟記)나 옛 건물이 전하지 않으며, 6·25전쟁을 거치면서 사찰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 수화승 성심(性沈) 등이 조성한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 등 불교 문화유산이 전하며, 조선시대 지리지· 지도·문집·근현대 행정문서 곳곳에서 서고사와 관련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황방산과 서고사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이야기가 지역에서 전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조선 후기 국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종류의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중 서고산과 서고사의 모습은 전국을 대상으로 제작한 전국지도(全國地圖), 한 도를 대상으로 한 도별지도(道別地圖), 각 고을의 정보를 자세하게 담은 군현지도(郡縣地圖)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전국지도에서는 19세기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靑丘圖)· 동여도(東輿圖) ·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사례가 있다.
청구도는 1834년(순조 34) 제작한 채색 필사본 지도로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판으로 구획했다. 전주부 서쪽에 ‘서고산’이라는 지명이 보이며 그 위쪽에는 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동여도는 1856년(철종 7)부터 1861년(철종 12) 사이 제작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의 채색 필사본 지도이다. 전주부 서쪽에 ‘서고산’과 ‘황방산’이라는 지명 사이로 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동여지도는 1861년 제작한 목판본 지도로 전주부 서쪽에 서고산이 라는 지명이 보이나, 앞서 제작한 지도와 달리 산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고 황방산이라는 지명도 포함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도별지도의 사례로 호남지도(湖南地圖, 보물)와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가 있다.
호남지도는 영조 연간(1724~1776)의 지도로 비변사인(備邊司印)이 찍혀 있어, 국정에 활용할 목적으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호남 전 지역을 그린 전도(全圖)와 군현 지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도는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뉘어 있다. 좌도 지도에 서고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선팔도지도는 병풍 형태의 지도로 한성부와 경기를 제외한 7개 도를 각각 두 폭에 걸쳐 표현했다. 전라도 지도에 전주 서쪽에 서고산이라는 지명과 산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19세기 서고사의 모습은 사찰을 직접 방문한 지식인과 승려가 남긴 한시의 내용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는 조선 후기의 지식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과 승려 초엄 복초(草广復初, ?~?)의 문집에 수록된 한시를 중심으로 서고사의 경관과 당시의 모습을 살펴본다.
조수삼은 본관이 한양(漢陽)이고 호가 추재(秋齋)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여항문인(閭巷文人)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시를 남겼다. 그의 문집 ‘추재집秋齋集’에는 ‘서고사(西高寺)라는 시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黃方高處有層臺 황방산 높은 곳에 층층의 누대가 있어,
坐看滄溟不滿杯 그 위에 앉아 푸른 물결 바라보니 한 잔에도 차지 않을 듯하네
北斗近人天一握 북두칠성은 사람 가까이 다가와 하늘과의 거리가 한 줌과 같으니,
西風欺客鬢雙摧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나그네를 몰아세워 양쪽 귀밑머리를 시렵게 하네
雲將赤日垂垂下 구름은 붉은 해를 거느리고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潮送靑山點點來 물결 너머의 푸른 산이 점점이 다가오는 듯하네
見說靈湫祈雨夜 전해 들으니 신령한 못에서 비를 빌던 밤,
驚聞禪室撼𣟴雷 선실을 뒤흔드는 우레 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네
이 시는 칠언율시로 제1구에서 서고사의 모습을 ‘황방산 높은 곳의 층층의 누대’로 표현했다. 이는 현재 서고사가 자리한 입지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으로 당시 서고사의 지형적 위치와 주변 경관을 짐작할 수있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조수삼은 해가 저물 무렵 서고사에 머물며 목격한 빼어난 경관에 감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8구에서 ‘선실(禪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수행 공간의 일면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조수삼의 시는 서고사의 입지와 경관뿐만 아니라, 사찰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초엄 복초는 1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활동한 승려이다. 박치복(1824~1894)에게 경사(經史)를, 강위(1820~1884)에게 시도(詩道_를 익혔다고 전한다. 그는 전국 각지를 유람하고 많은 글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글은 후대 석전 정호(石顚 鼎鎬, 1870~1948)가 초엄 복초의 글을 모아 편찬한 ‘초엄유고(草广遺稿)’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중 서고사와 관련한 시도 확인된다.
郊原浩蕩轉圓機 들판이 탁 트여 조화롭게 변화하니
深瀉幽人一念非 깊은 계곡 유인이 한 생각을 잘못했네
晩際山光靑欲雨 날이 저물 때 산의 색은 푸른 것이 비가 내릴 듯하고
夕西雲影白如衣 석양 지는 서쪽 구름 흰 것이 옷과 같구나
千里雪風吹不斷 천 리 되는 눈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니
數州烟火望全微 여러 고을의 연기와 불빛은 전혀 보이질 않네
蓬萊一髮天中翠 봉래산의 한 나무만 하늘 가운데서 푸른데
仙老邀人欲與歸 신선 같은 늙은이가 사람을 맞아 함께 돌아가려네
이 시에는 초엄 복초가 서고사에서 주변 지역을 바라보며 느낀 감회와 정서가 잘 드러난다. 탁 트인 들판이나 석양의 풍경은 앞서 살펴본 조수삼의 시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두 작품 모두 서고사에서 바라본 빼어난 경관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서고사의 경관은 당시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문인 민주현(1808~1882)이 전주의 경관을 보고 읊은 ‘완산가(完山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65구) 東固寺 西固寺의 (제66구) 多少樓臺 煙雨中을
(제67구) 大路가의 大野中의 (제68구) 拱北樓도 廣豁하다
(제69구) 萬化樓를 나아간이 (제70구) 半空 樓閣 壯하도다
(제71구) 濟濟한 學宮 선비 (제72구) 春誦夏絃 여긔로다
민주현은 1854년(철종 5) 조경묘(肇慶廟) 별검(別檢)으로 부임해 여러 해 전주에 머물면서 여러 경관을 살피고 이를 『완산가』에 담았다. 『완산가』는 제65구부터 제72구까지 전주의 여러 누대(樓臺)를 수록했는데 서고사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누대는 단순히 경관을 감상하는 장소를 넘어 사대부들의 문화와 교유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완산가』의 내용으로 민주현이 서고사를 직접 방문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완산가』의 내용으로 19세기 중반에는 서고사가 전주의 주요 명승으로 인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선유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전주 서고사 범종의 조성과 양식적 특징 고찰’
‘서고사 종’은 기존 연구에서는 18세기 또는 1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어 왔다. 본고에서는 명문의 내용과 당시 전라도 관찰사의 재임 기록, 종의 양식적 특징 등을 고려, 이 종이 1830년 전라도 관찰사 조인영의 발원으로 서고사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종의 크기로 보아 당시 작은 규모의 사찰이었던 서고사의 불전 내부에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범종의 전래 경위와 관련해서는 국가기록원에 보존 중인 1982년 「장기홍보계획」을 비롯한 서고사 연혁 자료와 국립중앙박물관 유물카드의 제실박물관 입수 기록을 종합하여, ‘서고사 종’이 아오키 분시치를 통해 1908년 박물관에 입수된 과정을 확인했다.
양식적으로는 간결한 문양 구성, 원권 바깥에 큼직한 삼각형 돌기를 두른 범자문과 연화문, 서수형 종뉴가 주목된다. 특히 1832년 김종득·김종이 형제가 제작한 <흥국사 남암명 석천사 종>과 문양의 형태 및 크기에서 보이는 유사성은 1830년 조성설을 뒷받침해 준다.
다만, <서고사 종>에 주종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전체 문양 구성 및 종뉴 형태 등에 차이가 있어 동일 제작자의 작품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향후 두 종 명문의 정밀한 판독과 제작 기법 조사 등을 통해 종의 조성자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번 학술대회가 <서고사 종>과 <나한상> 외 다른 서고사 불교미술품까지 범위를 넓혀 조사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강건우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전주 서고사 나한상에 대한 소고’
서고사 나한상은 노년에서 장년으로의 상호 변화와 나한상 각 부위에서 발생한 훼손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나한상은 일정 부분 『삼재도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조선 후기에 유행한 복호나한과 항룡나한 도상도 수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나한상의 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을 발원한 시주자, 불사에 참여한 조각승의 계보를 추정했다. 시주자들은 현세에서의 복덕을 기원하며 나한상 조성을 후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조선 후기 나한신앙이 기복신앙의 한 형태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1695년 나한상을 만든 조각승 성심도 주목된다. 성심은 여러 불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장한 이목구비와 안정적인 신체 비례를 특징으로 하는 나한상 양식을 정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나한상은 성심이 수화승으로 참여한 유일한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양석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CT를 활용한 전주 서고사 나한상의 제작기법 연구’
서고사 나한상 일괄의 CT 조사 결과는 선행연구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목조불상의 제작기법과 여러 점에서 부합하면서도, 존상의 성격과 제작 시기에 따른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먼저, 성형 방식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제불입상과 같은 통목조의 전통이 확인된다. 18세기 초 승려 진열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상에서도 통나무의 내부를 파낸 점과 얼굴·귀의 별도 결합, 가슴의 거멀쇠 사용, 어깨와 다리 상단부의 사각형 목재 삽입이 확인됐다.
서고사 나한상에서도 얼굴의 별도 결구와 목재 삽입·거멀쇠에 의한 보수가 확인되므로, 이들 공정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조선 후기 목조불상의 제작과 관리에서 공유된 관행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특별전을 통해 서고사 나한상의 수화승 성심이 조각승 진열의 양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검토할 단서로 제시한 바 있다. 제작기법의 유사성은 이러한 조각승 계보 논의와 함께 다룰 만한 자료이다. 반면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확인된 접목조 구조는 서고사 나한상 일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여러 목재를 접합하여 형상을 만들었으며 특히 우측 무릎에만 13개의 목재 조각이 사용된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이에 비해 서고사 나한상 일괄은 하나의 원목을 중심으로 제작하고 얼굴과 바닥장식 등 필요한 부분만 별도로 결구했다.
바로 이같은 차이는 조성 시기와 계보, 그리고 윤왕좌와 같은 비대칭 자세를 구현해야 하는 존상의 형상에 따른 기술적 선택의 차이로 해석할 여지가 있으나, 이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시기와 존상을 달리하는 다수의 사례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접합 방식에서도 서고사 나한상은 얼굴·귀·복장공·바닥판 등 결구부 전반에 금속 못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재질에 따른 차이도 확인된다. 서고사 목조상은 등 또는 뒤통수에 복장공을 두고 목부재로 막는 방식이 일반적인 반면, 석불좌상 868은 암석 자체를 파내어 복장 공간을 조성하고 그 바닥을 나무로 막았으며 목조상과 같은 별도의 복장공은 확인되지 않는다.
△ 박승원 국립전주박물관 학에연구사의 ‘전주 서고사 나한상 복장 후령통 연구’
전주 서고사 나한상에서 수습된 복장품 중 후령통은 황색 면직물로 만든 황초폭자로 싸여 있고 오색실과 동심결매듭, 근봉지로 봉인된 모습이다. 전산화단층촬영을 통해 후령통의 외형과 구조, 내부 구성을 판독한 결과 유사성과 차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령통은 자기(백자)이며 안립 물목을 조사하여 기록한 최초의 보고이다. 황초폭자도 황색의 면직물로 동일하다. 방위를 표시하는 오방경은 동서남북 4방위가 후령통 외부에 오색실로 묶여 있었고 방경, 삼각경, 원경, 반월경 모두 성분 분석 결과 황동으로 확인됐다.
중앙을 표시하는 원경은 팔엽연화에 감싼 상태로 발견됐고 재질은 철이다. 오색실은 황초폭자를 묶을 때, 후령통 외부에 오방경을 고정할 때, 오보병의 각 보병을 돌려 묶을 때 사용됐다. 청색, 홍색, 백색, 흑색, 황색의 5가지 색상이 모두 사용되게 했고 청색은 견사, 나머지는 면사이다. 각 보병 직물에 사용된 원료 섬유의 종류와 같은 종류의 실이다.
오륜종자에 쓰인 범어는 방위 색상과 동일한 색상의 안료로 적었고 흑색은 먹으로 적었다. 유리편과 광물편의 사용은 차이가 있으나 곡물·씨앗류는 각 방위별로 같은 종류와 가짓수로 안립됐다. 나무재와 식물재는 유사성을 보이나 종류를 정확하게 판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상으로 후령통의 해포, 수습을 통해 안립된 물목을 조사하고 특성을 확인하였으며 두 존자의 안립 물목을 비교해 봄으로써 목조 나한상 복장품의 기초 자료를 확보하였다. 본 연구가 앞으로의 불교조각 조사연구에서 다른 불상 복장품과의 비교 연구에 적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가 되기를 기대한다.
△ 박진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전주 서고사 나한상에 사용된 안료의 성분 분석’
서고사 나한상의 표면 채색층에 대한 성분 분석 결과 대체로 재채색이 이루어져 원래의 채색층과 그 재료를 식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환수 이후의 조사를 통해 환수품들은 원래 채색층 위에 덧칠이 됐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번에 실시한 조사의 대상품들은 도난되지 않은 3구, 도난된 2구로 구분, 표면 채색층에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그러나 도난 여부와 관계없이 원래 봉안처에 모셔져 있던 3구의 목조각상에서도 원래의 채색층 위에 재채색 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다만 이에 대한 공식적인 수리 및 보수 기록은 확인하지 못하였으며, 추후에 이와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색상 계열별로 정리해보면, 백색 및 살구색 계열은 모두 티타늄화이트를 중심으로 사용하였음을 확인했다. 티타늄화이트를 단독 또는 조색하여 발색을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적색 계열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진사와 연단을 사용하거나, 일부 영역에서는 크롬레드와 카드뮴레드 등 현대 합성안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녹색 계열은 크롬그린과 에메랄드그린을 위주로 재채색이 이루어졌다.
청색 계열의 안료는 구리(Cu) 계열의 광물 안료가 확인되지 않고 합성안료를 티타늄화이트와 함께 조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청색 계열의 합성안료는 XRF를 통한 분석으로는 동정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추후에 다른 분석 방법과 병행해야 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환수품들을 제외하고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던 나한상들의 의복에서 공통적으로 금색 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도난된 8구를 제외한 10구는 가사에 금색 문양이 있으며, 이는 사찰에서 재채색이 이루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이 금빛 문양에서는 티타늄과 함께 미량의 철이 검출됐다. 이를 통해 운모(mica) 기반의 티타늄산화물을 코팅한 진주광택(pearlescent) 합성 안료를 금(Au)과 함께 또는 단독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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