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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쟁의 모습을 뒤바꾼 기차시간표 그리고 AI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

AI는 이미 인간을 지휘하고 있다 엄청난 타격을 입은 러시아는 곧 드론에 대항할 방법을 찾는다. 우크라이나... 결국 AI가 탑재된 드론의 등장은 필연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AI 드론을 실전 운용 중이다. 우크라이나에...

전쟁의 모습을 뒤바꾼 기차시간표 그리고 AI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

만약 사물의 탐구가 인간을 죽이는 일로 귀결된다면 그 앎은 과연 추구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인간을 위한’ 격물치지가 필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인들에게 작별 인사하는 사람들.

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년 가까이 유럽에서는 세계대전 규모의 큰 전쟁이 없었다. 크림전쟁이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있지만, 그 규모와 참혹함 면에서 사망자만 2200만명에 달했던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하기는 힘들다.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 돌입할 필연적 이유나 강한 동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식민지를 두고 서로 경쟁하며 세계를 제멋대로 주무르던 열강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밀 외교를 통해 복잡한 군사조약을 맺었고(조폭이 패거리를 만든 거랑 비슷하다), 한두 나라가 전쟁을 시작하자 조약에 엮여 줄줄이 전쟁으로 끌려 들어갔다.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 경쟁의 선발 주자인 영국, 프랑스와 후발 주자인 독일 사이의 갈등이 터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A. J. P. 테일러의 〈기차 시간표 전쟁〉은 기차 때문에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당시 유럽 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래 도입된 국민개병제를 기초로, 유사시 군인 수백만 명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승리의 관건은 ‘엄청난 병력을 누가 먼저 전장에 배치하느냐’였다. 먼저 전투 준비를 마친 나라에서 공격을 개시하면 아직 준비가 덜 된 쪽은 무조건 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시적소(適時適所)에 충분한 병력이 있어야 승리한다는 것이야말로 나폴레옹 전쟁이 준 교훈이다. 문제는 많은 병력을 정확한 위치에 빠르게 배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KTX로 100만명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시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경부선 기준 주말 KTX는 하루 약 130회 운행하며 20만명 정도를 수송할 수 있다. 즉, 지금의 고속열차로도 이동에만 최소 5일이 걸릴 거란 이야기다. 당시 프랑스는 300만명이 넘는 인원을 모아 무기와 군복을 지급하고, 부대로 편성하고, 증기기관차를 이용해 국경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우리나라는 철도 라인이 몇 개 없지만 프랑스나 독일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철도망을 가지고 있었다. 병력 이동에 관한 기차 시간표를 면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유럽 각국은 전쟁 발발 시 병력 이동에 대한 ‘기차 시간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간표는 너무 정교하여 쉽게 바꿀 수 없었다. 더구나 일단 병력이 동원되기 시작하면 중간에 수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뒤죽박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전쟁에서 패배를 의미한다.

줄줄이 이어진 선전포고 뒤에는

빠른 병력 동원이 승부를 가르는 상황이었기에 병력 동원 선포가 곧 전쟁 선포인지에 대해 모호성이 생기게 되었다. 몇몇 나라는 일단 동원을 하고 전쟁 선포 여부는 나중에 결정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나라는 상대의 병력 동원을 사실상 전쟁 선포로 받아들였다. 동원의 기미만 보여도 심각한 위협으로 여길 수 있었다. 병력 배치가 늦은 나라가 절대적으로 전투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7월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하자, 7월25일 세르비아는 병력 동원을 결정한다. 그 뒤 유럽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7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7월30일 러시아가 병력 동원을 결정했으며, 독일은 8월1일 러시아에, 8월3일엔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한다. 8월4일엔 영국과 벨기에가 독일에, 독일은 벨기에에 전쟁을 선포하고, 8월6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8월12일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한다. 한 나라가 병력을 동원하는 순간, 군사조약으로 묶인 다른 나라들 역시 줄줄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병력 동원을 위해 촘촘하게 짜인 기차 시간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전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은 병력 동원 경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동원된 많은 병력은 결국 ‘기관총’이라는 기계를 향해 돌격하다가 사라졌다. 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고도 유럽은 다시 2차 세계대전에 휩쓸린다. 이 전쟁의 사망자는 5500만~85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전쟁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국제 정세를 보며 1차 세계대전 직전과 닮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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