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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시 따라잡기] 구자현 작가 개인전…히든스페이스 내달 18일까지

판화는 오랫동안 ‘복수 제작이 가능한 미술’이라는 특성으로 정의돼 왔다. 하나의 원판에서 여러 장의 이미지를 찍어내는 방식은 회화와 조각과는 다른 판화만의 물성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복수성은 역설적으로 판화를 회화와 비교해 ‘유일성’의 가치에서 다소 다른 위치에 놓이게 했다.

작가의 ‘판화, 새 가능성 찾기’가 한국 판화 변화 중심축

“판화는 배우고 전승해야 할 영역”

日 유학 8년 동안 기초·기법 익혀

귀국 후 관련 저서·번역 등 출간

목판·스크린 등 다양한 판종 섭렵

구자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히든스페이스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판화는 오랫동안 ‘복수 제작이 가능한 미술’이라는 특성으로 정의돼 왔다. 하나의 원판에서 여러 장의 이미지를 찍어내는 방식은 회화와 조각과는 다른 판화만의 물성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복수성은 역설적으로 판화를 회화와 비교해 ‘유일성’의 가치에서 다소 다른 위치에 놓이게 했다.

특히 대형 회화가 미술의 중심에 놓이던 시대에 판화는 상대적으로 작은 화면과 제한적인 재료, 반복 가능한 제작방식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 가능성이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 구자현 히든스페이스 대규모 개인전

갤러리 히든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구자현의 작업은 판화를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에 균열을 내는 것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그의 작품이 판화의 속성인 ‘찍어냈다’라는 이미지보다 한 점의 ‘회화’처럼 독립된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석판화·스크린판화·목판화를 중심으로 그의 판화 세계를 한자리에서 보여주고 있다.

구자현의 판화 인생은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간다. 대구에서 섬유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가업 잇기를 위해 아들에게 디자인 공부를 권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도서관에서 현대미술과 일본 판화 관련 서적을 우연히 접하면서 그의 진로는 판화로 급선회했다.

판화 공부를 위한 첫 여정은 일본 유학이었다. 그는 오사카예술대학과 교토 세이카대학 판화과, 큐슈산교우대학 대학원 서양화과 등에서 8년간 공부하며 판화의 기초부터 전문적인 제작기법까지 익혔다.

구자현의 일본행은 열악했던 국내 판화 환경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국내 판화 환경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판화지와 잉크, 프레스기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판화 제작기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일본에서 판화를 제대로 공부한 후 귀국한 그는 판화 관련 책 저술과 작품 제작에 매진했다. 책 저술은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판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역할도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취지에 따라 1989년 미진사에서 ‘판화’를 펴냈고, 이후 ‘서양판화사 개론’과 ‘현대판화의 기초지식’, ‘회화 술의서’ 등을 번역·출간했다. 그의 책 편찬은 국내에 잘못 알려진 판화 기법을 바로잡고, 제대로 된 제작방법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에 맞춰졌다.

“제게 판화는 하나의 예술 장르인 동시에 배우고, 연구하고, 전승해야 할 예술의 영역이었어요. 그래서 판화 관련 책을 쓰게 됐습니다.”

구자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히든스페이스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 판종의 특성에 최적화된 판화 제작

책 저술과 함께 그의 판화 작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한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의 세계는 그야말로 다채롭게 전개됐다. 석판화와 스크린판화, 목판화 등의 다양한 판종을 섭렵했고, 각기 다른 판종에 따라 작업 또한 다채롭게 제시됐다.

“끊임없이 판종의 특성에 최적화된 재료와 기법, 그리고 작품의 규모를 찾았어요.”

그는 “판종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판화로 해야 할 작품을 석판화로 찍거나, 스크린판화의 특성을 무시한 채 다른 판종의 표현을 흉내 내는 것은 판화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목판화를 제작할 때는 볼록판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했다. 판을 파내고 남은 볼록한 부분에 잉크를 묻혀 찍었다. 그 결과 선과 면, 파고 들어간 흔적과 손의 힘이 화면에 남았다. “제게 목판은 반복되는 신체 노동을 통해 무념의 상태에 다가가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석판화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물과 기름이 서로 밀어내는 성질을 이용해 판면에 그린 드로잉을 옮겼다. 미세한 농담과 회화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이 석판화의 특징이었다. 구자현은 석판화에 20년 이상 매달렸다. “석판화는 그 자체로 오랜 수행의 과정이었습니다.”

특히 석판화의 경우 기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재료가 반응하면서 만들어 내는 흔적을 받아들였다. 작가가 의도한 것과 재료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만나면서 화면이 형성됐다. “우연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방치하지 않고 저의 경험과 기술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스크린판화에서는 그의 독창성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반적인 스크린판화는 한 번의 프린팅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프린팅을 했다. 회화와 같은 색의 중첩 기법의 도입이었다.

중첩은 대개 녹색 아래 금색, 그 아래 붉은색과 분홍색 등 다양한 색의 겹침으로 진행됐다. 색의 중첩 과정을 알 수 있도록 가장자리에는 완전한 겹침을 비껴갔다. 그 결과 가장자리에는 겹쳐진 색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판에 색을 입히는 도구인 스퀴지가 지나간 흔적과 작가의 손과 시간의 움직임이 화면에 고스란히 기록된 것이었다.

색의 중첩에는 자연스럽게 시간성이 배어들었다. 하나의 색을 찍고, 말린 후에 또 다른 색을 찍고 말리는 반복된 행위 속에 시간성이 자리를 잡았다. “저의 스크린판화는 화면 자체가 시간의 기록입니다.”

구자현 작. 갤러리 히든스페이스 제공

기술 아닌 조형언어로 접근 ‘성과’

재료·색 바꾸며 새 방법 찾아 표현

제작 과정 노동 개입 작가성 강화

작가의 재평가 대규모 전시 ‘의미’

◇ ‘판화의 내부에서 판화의 한계를 넘어서다’

구자현 판화의 성과는 기존 판화의 답습에서 벗어나 물성과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의 독자성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먼저 작가 중심의 판화 구축이다. 그는 직접 그리고, 직접 새기고, 직접 찍어내는 ‘자화(自畵)·자각(自刻)·자접(自摺)’으로 판화를 완성한다.

“판화 제작을 공방이나 전문 기술자에게 맡기기보다 그리기·판 만들기·프린팅 등의 전 과정을 직접 제작합니다.”

재료와 기법을 스스로 개발한 독창성도 그의 성과다. 그는 기존의 판화재료와 기법의 답습에서 일찍부터 벗어나 판화의 확장을 모색했다. 어떤 재료를 선택하고 가공할지, 색을 어떻게 중첩하고 화면에 정착시킬지, 판과 종이를 어떻게 관계 맺게 할지를 오랜 시간 실험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다양한 실험의 결과 다른 판화와 쉽게 구별되는 독특한 표면과 색감을 만들 수 있었어요.”

구자현의 또 다른 독자성은 100호를 넘어 150호, 200호에 이르는 대형 판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작은 화면을 전제로 해온 판화의 물리적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부단한 노력과 투자의 결과 그의 판화는 규모의 확대로 이어졌다.

판화를 ‘기술’이 아닌 ‘조형언어’로 바라본 태도 또한 그의 남다른 성과다. 구자현에게 판화는 단순히 판화 작품 하나를 만드는 것에 제한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재료와 색, 표면과 제작 과정, 크기와 형식을 끊임없이 실험하며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찾아가는 하나의 조형언어로 인식했고, 그 인식의 구자현표 판화 세계 구축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제게 판화는 정해진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재료와 색을 직접 바꿔보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면서 제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어요.”

구자현 작가가 갤러리 히든스페이스 전시장에 걸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옥기자

◇ 구자현의 판화

한국 미술의 변화는 회화와 조각을 비롯해 설치와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장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고, 그 과정은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돼 왔다. 반면 판화가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매체적 한계를 어떻게 넓혀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구자현의 작업은 한국 현대판화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한 축이 될 수 있다. 하나의 매체를 평생 깊이 파고들어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온 그의 작업은 한 작가의 독창적인 성취를 넘어, 한국 판화가 어떻게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혀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근거는 분명하다. 재료와 기법을 스스로 개발해 독자적인 색과 표면을 만들었고, 대형 작업을 통해 판화의 물리적 규모를 확장했으며, 제작의 전 과정에 자신의 노동을 개입시켜 판화의 작가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구자현의 판화는 ‘대형 판화를 만든 작가’나 ‘독특한 색감을 가진 판화가’라는 개별적인 성과를 넘어선다. 그의 평생에 걸친 질문은 “판화에서 무엇이 가능한가”에서 “판화란 무엇인가”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판화의 재료와 기법, 색과 표면, 규모와 제작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따라서 구자현의 예술을 제대로 평가하는 일은 한국 현대판화가 실제로 어디까지 확장돼 왔는지를 다시금 살피는 일이 된다. 이번 전시는 그의 판화를 재평가하는 대규모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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