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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라 Insight]군산 선유도, 해상문명 군사-교역 요충지였다

군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풍경이 달라진다. 육지의 소음은 잦아들고, 바다는 점점 가까워진다. 길은 바다 위를 가르듯 이어지고, 어느 순간 섬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된 고군산군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유도가 있다.

[전라 Insight]군산 선유도, 해상문명 군사-교역 요충지였다

군산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풍경이 달라진다. 육지의 소음은 잦아들고, 바다는 점점 가까워진다. 길은 바다 위를 가르듯 이어지고, 어느 순간 섬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된 고군산군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유도가 있다.

지금의 선유도는 관광지다. 여름이면 해수욕장에는 피서객이 넘치고, 주말이면 캠핑과 차박 행렬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섬의 진짜 얼굴은 따로 있다. 바다와 기록, 그리고 유물이 말해주는 선유도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닌 ‘서해 해상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이었다.

이 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풍경이 아니라 역사부터 읽어야 한다. 편집자

-바다 위 군도의 중심, 선유도

고군산군도는 유인도 16개, 무인도 46개 등 총 6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름 그대로 ‘산처럼 솟은 섬들이 모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가운데 선유도는 면적 2.13㎢의 작은 섬이지만 군도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다. 행정구역상 군산시 옥도면 선유리에 속하며, 현재 약 500여 명의 주민이 어업과 관광업을 병행하며 생활하고 있다.

섬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선유항을 중심으로 한 1구역, 학교와 체험시설이 있는 2구역, 해수욕장과 어촌체험마을이 자리한 3구역이다. 오늘날에는 생활권이 나뉘지만, 역사적으로는 이 모든 공간이 하나의 거대한 해상 거점이었다.

지리적으로도 선유도는 독특한 구조를 갖는다. 동쪽에는 신시도, 남쪽에는 무녀도, 서쪽에는 장자도, 북쪽에는 방축도와 말도 등이 둘러싸고 있다. 마치 여러 섬이 방패처럼 감싸 안은 형국이다.

현지 문화해설사 편정수 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선유도는 주변 섬들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태풍을 피하기 좋고, 배를 정박하기에도 안정적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군사와 무역의 거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 사신 1000명이 머문 섬

선유도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고려시대 문헌에서 확인된다.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며 남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선유도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서긍은 이곳에 약 20일간 머물렀다.

당시 사신단 규모는 상당했다. 배 5척에 한 척당 약 200명이 탑승했으니, 전체 인원은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대규모 외교 사절단이었다.

더 주목할 점은 고려 조정의 대응이다. 역사서에 따르면 당시 권력 핵심이었던 김부식이 직접 선유도로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이는 선유도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라 ‘국가급 외교 거점’이었음을 의미한다.

서긍은 기록에서 오룡묘, 자복사, 송산행궁, 객관 등을 언급한다. 이를 종합하면 선유도에는 왕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시설, 종교 공간까지 갖춰져 있었다.

일종의 ‘해상 수도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현재 대부분의 시설은 사라졌지만, 군산대 연구팀이 객관 터로 추정되는 유적과 고려청자 파편, 배수시설 등을 발굴하면서 역사적 실체가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 일대는 국가 명승으로 지정됐다.

-조선 수군의 전략기지

선유도의 역할은 고려시대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 더욱 중요해진다. 고군산진이 설치되면서 수군 기지가 운영됐고, 문헌에 따르면 군선 20여 척과 병력 1200명이 주둔했다.

가족까지 포함하면 최소 2500명 이상이 이 일대에서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군사 도시’ 수준의 규모다.

특히 전라 지역 수군을 총괄하는 수군절제사가 이곳을 거점으로 임피, 군창, 만경, 김제, 부안, 고창, 영광 등 8개 지역을 관할했다는 점에서 선유도의 위상은 더욱 분명해진다.

현재 선유도에는 당시 수군절제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5기가 남아 있다. 관청 건물은 1938년 화재로 소실됐지만, 터는 국가 사적으로 보호되고 있다.

-이순신이 머문 11일

선유도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깊은 인연을 갖는다.

1597년 정유재란.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적의 추격을 피해 북상한다. 그리고 해전 6일 뒤인 9월 21일, 선유도에 도착한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당시 이순신은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고, 가을 태풍까지 겹쳐 함대 이동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선유도에서 11일 동안 머물며 전열을 정비한다.

이 기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재정비의 시간’이었다. 이후 조선 수군은 다시 전력을 회복했고, 결국 노량해전으로 이어진다.

선유도는 단순한 기항지가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바꾼 ‘숨 고르기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바다 속에서 나온 증거들

역사적 기록은 문헌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 속에서도 계속 확인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고군산 해역을 국가 중요 수중유산 구역으로 지정했다. 최근까지 이 일대에서 발견된 유물은 200여 점에 이른다.

고려청자 125점, 분청사기 9점, 백자 49점, 닻돌 3점 등이다.

이 유물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이곳이 대규모 해상 교역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1872년 제작된 ‘고군산군도 지도’에도 이 해역은 바람을 피하거나 기다리는 선박이 머무는 곳으로 기록돼 있다.

즉 선유도는 단순히 배가 지나가는 길목이 아니라 ‘머무르고 교류하는 공간’이었다.

-설화로 이어진 또 다른 역사

선유도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도 남아 있다.

망주봉에는 ‘내선완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 안에서 왕을 뽑자”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일부에서는 고려 삼별초가 이곳에 머물며 남긴 흔적으로 추정한다.

또 왕릉이 존재했다는 설화, 이를 둘러싼 도굴 사건 이야기 등도 전해진다.

망주봉 자체에도 사연이 담겨 있다. 귀양 온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며 매일 올라 바라봤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이처럼 선유도는 역사와 설화가 겹겹이 쌓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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