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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라 Insight] 왕의 얼굴 품은 경기전, 600년 시간의 문을 열다

전주한옥마을의 골목을 걷다 보면 높은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이 고개를 내민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진보다 훨씬 오래된 ‘왕의 얼굴’이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다.

[전라 Insight] 왕의 얼굴 품은 경기전, 600년 시간의 문을 열다

전주한옥마을의 골목을 걷다 보면 높은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이 고개를 내민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진보다 훨씬 오래된 ‘왕의 얼굴’이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다. 그 얼굴을 소중하게 모시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경기전이다. 경기전은 왕이 살면서 나라를 다스리던 궁궐이 아니다. 왕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특별한 공간이다. 쉽게 말하면 조선을 처음 세운 왕을 기억하는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 담긴 이야기는 왕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전쟁의 불길을 피해 그림과 책을 옮긴 사람들,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이제 경기전의 문을 열고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눈앞의 나무와 돌길 사이로 600년이 넘는 역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편집자

-“여기서는 말에서 내려 주세요”

옛날 말을 탄 사람이 경기전 앞에 도착했다고 상상해 보자. 멋진 옷을 입고 높은 벼슬을 뽐내던 사람도 이곳에서는 말에서 내려야 했다. 입구의 ‘하마비’가 그렇게 알려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는 말에서 내린다는 뜻이고, ‘비’는 글을 새긴 돌을 말한다. 왕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니 공손한 마음으로 들어가라는 안내판인 셈이다.

조금 더 들어가면 붉은색 문이 눈에 띈다. ‘홍살문’이다. 이 문은 경기전이 함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예의를 갖춰야 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보여 준다. 그 뒤로 외신문과 내신문이 이어지고, 안쪽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시던 중심 건물인 정전이 자리한다.

문을 하나씩 지나는 길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바깥 골목에서 떠들며 걷다가도 안으로 들어서면 발걸음이 느려진다. 옛사람들은 왕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곳에서 왕의 초상화를 마주하며 나라의 시작을 떠올렸다.

-전주에 왕의 초상화가 온 까닭

이야기의 첫 장면은 1410년이다.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초상화를 전주에 모셨다. 당시 이 공간은 ‘어용전’이라고 불렸다. 왕의 모습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이후 다른 이름을 거쳐 1442년 세종 때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왜 전주였을까. 전주는 조선 왕실인 전주 이씨의 뿌리가 있는 고장이었다. 이성계 개인의 출생지라는 뜻이 아니라, 왕실 가문의 선조들이 살아온 본향이라는 의미다. 조선 왕실은 전주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경기’에는 조선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전’은 큰 집이나 전각을 가리킨다. 따라서 경기전이라는 이름에는 나라를 세운 왕과 왕실의 시작을 오래 기억하겠다는 마음이 들어 있다.

어린이들이 가족사진을 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를 듣듯, 조선 왕실도 태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뿌리를 되새겼던 것이다. 다만 경기전은 한 가족의 추억을 넘어 나라 차원에서 왕을 기리고 예를 올리던 장소였다.

-파란 옷을 입은 임금님

왕의 초상화는 특별히 ‘어진’이라고 부른다.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이 간직한 대표적인 보물이 태조 어진이다. 그림 속 이성계는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머리에는 왕이 쓰던 익선관을 쓰고, 몸에는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다. 익선관과 곤룡포는 왕이 평소 나랏일을 할 때 갖추던 차림이다.

“왕은 빨간 옷을 입는 것 아니었나요?”

그림을 보는 어린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태조 어진 속 옷은 푸른색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던 왕의 모습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얼굴의 윤곽과 눈매, 옷의 주름을 따라가다 보면 옛 화가들이 한 사람의 모습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담으려 했는지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꼭 알아둘 사실이 하나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태조 어진은 1410년부터 남아 있던 그림 그 자체가 아니다. 오래된 원본이 낡자 1872년 고종 때 화가들이 원래 모습을 충실하게 옮겨 그린 그림이다. 이를 ‘이모’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비슷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원본의 모습을 정밀하게 이어받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이어진 태조의 얼굴은 2012년 국보로 지정됐다. 오래된 그림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초상화 제작 전통과 뛰어난 표현을 보여 주는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책을 보관한 집, ‘사고’의 비밀

경기전에서는 왕의 얼굴뿐 아니라 나라의 기록도 만날 수 있다. 경내에 자리한 전주사고 이야기다. 여기서 ‘사고’는 다치거나 물건이 망가지는 사고가 아니다. 역사를 기록한 책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뜻이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돼 있었다. 실록은 왕들의 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한 역사책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의 정치를 살피고 당시의 사건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다. 왕의 얼굴을 지킨 경기전 곁에 나라의 기억을 지키는 책 창고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종이로 만든 책은 불에 약하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한번 불길에 휩싸이면 오랫동안 쌓아온 기록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경기전과 전주사고의 역사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은 바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찾아왔다.

-전쟁의 불길 앞에서 시작된 구출 작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은 사람들의 삶뿐 아니라 나라의 기록까지 위협했다. 당시 여러 사고에 보관하던 실록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경기전 관리인 오희길과 태인의 선비 안의·손홍록 등이 있었다. 태인은 오늘날 정읍 지역이다. 관청과 민간이 힘을 모아 실록과 태조 어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고, 안의와 손홍록은 내장산에서 기록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한번 상상해 보자. 자동차도 없고, 반듯한 포장도로도 없는 시대다. 무거운 책을 담은 궤짝을 옮겨야 하고, 소중한 그림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전주에서 정읍 내장산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나라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한 피란길이었다.

옮겨야 할 물건도 적지 않았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당시 전주사고에는 실록 614책이 47개 궤짝에 나뉘어 있었고, 『고려사』 등 다른 책 556책이 별도의 15개 궤짝에 보관돼 있었다. 실록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중요한 기록을 함께 지켜야 했다.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고 일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책과 그림이 무사한지 살펴보고 지키는 시간이 이어졌다. 안의와 손홍록의 실록 수호 활동은 ‘임계기사’라는 기록으로도 남았다. 역사책을 지킨 사람들의 행동이 다시 역사 기록이 된 것이다.

-불타버린 집, 다시 돌아온 왕의 얼굴

사람들이 귀중한 그림과 기록을 지켜냈지만 건물까지 모두 구할 수는 없었다. 경기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다. 1410년에 시작된 왕의 초상화 집이 전쟁 속에서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경기전의 이야기는 잿더미에서 끝나지 않았다. 1614년 광해군 때 건물을 다시 세우고, 전란을 피해 옮겨 두었던 태조의 어진을 다시 모셨다. 지금의 경기전 역사를 이야기할 때 처음 세운 해인 1410년과 다시 지은 해인 1614년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집은 불탔어도 그 집이 품고 있던 뜻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진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에 왕의 얼굴은 돌아올 수 있었다. 건물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후대의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조선의 시작을 떠올릴 수 있게 됐다.

오늘날 경기전의 정전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전주사고 역시 옛 기록 창고의 의미를 전하는 복원 건물이다. 눈앞의 건물이 언제 처음 생겼고, 언제 다시 세워졌는지 알아보면 유산을 보는 눈도 한층 깊어진다.

-그림 한 점의 여행에도 정성이 가득

1872년 새로 옮겨 그린 태조 어진을 경기전에 모시는 일에도 많은 정성이 들어갔다. 왕의 그림은 평범한 짐처럼 운반하지 않았다. 정해진 의식에 따라 가마와 여러 도구를 갖춰 이동했다. 경기전에는 당시 어진을 모실 때 사용한 가마와 의식구가 전해진다.

어린이들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림인데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옮겼을까?” 조선 사람들에게 어진은 단순한 그림을 넘어 왕을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왕의 얼굴을 모시는 절차에도 그에 맞는 예의를 담았다.

경기전 안의 어진박물관은 이런 이야기를 이어 주는 공간이다. 태조 어진과 관련 유물을 통해 왕의 초상화가 어떻게 보존되고 전해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 경기전이 왕을 기억하는 집이라면, 박물관은 그 기억을 오늘의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안내자다.

-경기전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

경기전을 처음 찾으면 왕의 얼굴이 가장 궁금하다. 그러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주인공들이 보인다. 전쟁 속에서 어진과 실록을 옮긴 관리와 선비들, 원래 모습을 이어 그린 화가들,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다.

태조가 조선의 시작을 상징한다면, 이들은 그 시작을 후대에 전해 준 사람들이다. 누군가 소중히 여기고 지키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그림과 기록도 남아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기전을 나서는 길에는 처음 들어올 때와 조금 다른 풍경이 보인다. 하마비는 예의를 알려 주는 돌이 되고, 정전은 전쟁을 딛고 다시 일어선 집이 된다. 전주사고는 책 창고를 넘어 사람들의 용기로 지켜낸 기억의 장소가 된다.

아이들과 함께 경기전을 걷는다면 질문 하나를 건네 보자.

“아주 먼 훗날의 사람들에게 꼭 전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이니?”

경기전의 역사는 오래된 왕의 얼굴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오늘의 우리에게 닿는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지킬 것인가. 600년 넘게 이어진 이곳의 이야기는 그 질문을 조용히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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