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항량 11척·92% 급감…평시 138척 대비 해상 물류 사실상 중단
원유 1400만배럴·26척 고립…통행료 780억원·제재 리스크 확대
나프타 77% 중동 의존 구조…3개월 지속 시 생산비 11.8% 상승
금리 2.50% 7회 동결…성장률 하방 압력·물가 상승률 동반 확대
에너지 위기와 지정학적 긴장 이미지. 사진= 제미나이.
미국과 이란간 휴전합의 사흘째인 10일 국내 에너지 및 원자재 공급망이 오리무중인 상태에 빠진 것으로 지적됐다.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다.
이란이 휴전 기간에도 통항 선박 수를 하루 15척 이내로 제한하고 고액의 통행료를 요구하는 등 사실상 봉쇄에 준하는 조치를 이어가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됐다.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해상 물류 전반을 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이란 휴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해협 개방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태 장기화 시 국내 경제가 올스톱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날 산업통상부 및 업계에 따르면, 지난 8일 미·이란 휴전 이후 이날까지 사흘 동안 호르무즈 해협 내 우리 선박들의 통항 여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공급망 확보를 위해 외교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이대로 장기화될 경우 산업 생산 현장이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평시 대비 2.6%에 불과한 통항량...무늬만 휴전이 부른 물류 질식
영국 BBC 방송이 해상데이터 서비스업체 '마린 트래픽'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날까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선박은 겨우 11척에 그쳤다.
이는 지난 2월 28일 개전 전 하루 평균 통항량인 138척과 비교할 때 무려 92% 이상 급감한 수치로 알려졌다.
평상시 하루치 물동량의 10분의 1조차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이번 휴전 합의가 실질적인 물류 해소가 아닌 이란의 전략적 시간 벌기에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통과된 11척이 사실상 모두 이란 소유이거나 이란 혁명수비대의 직접 통제를 받는 선박으로 확인됨에 따라 우리 선사들이 기대했던 안전 통항권은 현재로서 수치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는 분석이다.
현재 해협 내측에는 한국 국적선 26척(선원 173명 승선)을 포함한 다수의 상선이 고립돼 통항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로 알려졌다.
◆ 1400만 배럴 고립과 780억 통행료...금융 제재라는 이중고
현재 해협 내에 묶여 있는 우리 유조선 7척(국적선 4척 포함)에는 원유 약 1400만 배럴이 실려 있다.
이는 국내 하루 원유 소비량(280만 배럴)의 5일치 분량으로 알려졌다.
도입이 지연될 경우 정유 공장의 안정적인 원료 수급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이란이 요구하는 척당 최대 200만 달러(약 30억원)의 통행료는 정유업계에 큰 부담으로 꼽힌다.
우리 선박 26척 전체가 지불할 경우 약 780억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금이 이란 측으로 흘러갈 경우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대상에 오를 위험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세컨더리 보이콧은 제재 대상 국가(이란)와 거래한 제3국의 기업이나 금융기관까지 미국이 일괄적으로 제재하는 방식을 말한다.
만약 우리 기업이 이란 혁명수비대에 통행료를 지불할 경우 미국 금융 시스템 이용이 전면 차단돼 글로벌 달러 결제망에서 영구 퇴출되는 금융 셧다운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통행료 지불은 제재 위반 소지가 커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안전 통항 확보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 나프타 의존도 77%의 역습...생산비 11.8% 상승의 도미노 파장
에너지원보다 실물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품목으로 나프타가 지목됐다.
국내에서 연간 사용하는 나프타 5900만톤(t) 가운데 수입 물량이 45%에 달하며 이 중 77%가 중동에 편중된 구조로 이번 봉쇄가 제조업 전반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3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한국 제조업 평균 생산비는 11.8% 상승할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중소 제조기업에 생산할수록 손해인 구조를 강요하는 수준으로 공장 가동 중단과 고용 축소로 이어질 수 있는 임계치로 평가됐다.
특히 플라스틱·합성섬유·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의 약 35%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반입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 인해 택배·유통업계 전반의 연쇄 마비가 불가피하며, 국민이 체감하는 물류 차질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 한은, 기준금리 2.50% 7회 연속 동결...트리플 악재에 갇힌 통화정책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이날 정례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2.50%로 다시 한번 동결했다. 이번 결정은 위원 7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이뤄졌다.
7회 연속 동결이라는 이번 결정은 중동발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고물가와 안전자산 선호 심리로 인한 고환율, 내수 침체가 겹친 이른바 트리플 악재 국면에서 통화당국의 고심이 깊어졌음을 시사한다.
한은은 금통위 결정문을 통해 호르무즈 사태 장기화 시 국내 경제 성장 경로에 상당한 하방 위험이 존재하며 물가 둔화 흐름 역시 제약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 차질의 영향으로 올해 성장률이 지난 2월 전망치(2.0%)를 밑돌 것으로 예상했다.
또 금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 2월 전망치인 2.2%를 상당 폭 웃돌 전망이라며 근원물가 상승률도 당초 전망인 2.1%보다 다소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금리를 인상해 물가를 억제하기에는 경기 둔화가 뚜렷하고 금리를 인하해 경기를 부양하기에는 대외 공급망 불안이 지속되는 외통수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수치와 결정문을 통해 보여준 것으로 분석됐다.
금통위는 의결문에서 중동 전쟁으로 물가 상방 압력과 성장 하방 압력이 함께 증대되고 금융·외환시장 변동성이 커진 만큼 사태의 추이를 좀 더 점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 정부 외교 총력전...2주 협상 시한이 골든타임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지난 7일 카자흐스탄과 오만,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며 대응에 나섰다.
당정은 홍해에 위치한 사우디아라비아 얀부항에 한국 국적 유조선 5척을 투입해 중동 원유를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우회 수급로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
다만 호르무즈 해협에 묶인 선박 26척과 선원 173명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 한 실효성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날 대한석유협회를 방문해 SK에너지, GS칼텍스 등 주요 정유사 대표들과 간담회를 갖고 대체 수급선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을 밝혔다.
구윤철 부총리는 확대간부회의에서 2주간의 휴전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대책을 선제적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위기 대응 과정에서도 구조개혁 동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쇼크 등 대외 변수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AI) 대전환과 초혁신경제 구현, K-GX 전략 추진 등 핵심 과제를 병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산업계와 공공기관은 에너지 사용 절감 등 비상 대응에 나서는 한편 정부의 외교적 대응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업계는 미·이란 간 통항 허가 조건 완화가 사태 해결의 핵심 변수라며 범국민적 에너지 절약 참여와 정부의 외교적 해법 마련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보고 있다.
업계관계자는 "정부는 미 재무부와의 긴급 협의를 통해 통행료 지불에 따른 세컨더리 보이콧 예외 승인(Waiver)을 즉각 확보하고 얀부항을 기점으로 한 육로 우회 수송망을 국가 물류 체계로 긴급 편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정부 기금을 통한 물류비 보전과 더불어 나프타 등 전략 원자재에 대한 비상 수급 조정권을 조속히 발동해야 한다"며 "2주의 골든타임 내에 외교적 합의를 이끌어내 실질적인 안전 통항권 확보와 수급로 다변화를 동시에 완수하는 것이 실물 경제 충격을 막을 유일한 해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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