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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잔] 도망쳐도 괜찮다, 저마다의 결과 방향이 있으니까

‘도망’이란 단어에는 비겁함이 묻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떻게든 맞서고 버텨서 이겨내야 한다고, 끝끝내 내가 설계한 길의 끝에 도달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인생은 바람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

[영화 한 잔] 도망쳐도 괜찮다, 저마다의 결과 방향이 있으니까

■ 김미영 감독 <절해고도>(2023)

성공이 아닌 출가 선택하며

도망 아닌 ‘도맹’ 의미 전달

타인 기준이 성취 정답 아냐

노력과 결과가 필연 아닌 세상

때때로 무기력에 잠식되지만

삶 감당하다 보면 단단해져

영화 <절해고도> 한 장면. /갈무리

‘도망’이란 단어에는 비겁함이 묻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떻게든 맞서고 버텨서 이겨내야 한다고, 끝끝내 내가 설계한 길의 끝에 도달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인생은 바람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

노력과 결실은 필연이 아니어서 억울하고, 기대했던 속도에 못 미쳐서 늘 조바심이 난다. 열심히 달려온 길이 잘못된 경로였단 걸 깨달을 때면 막막함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의 거대한 무기력에 잠식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내가 기대했던 나의 모습인가. 돌연히 시작되는 방황 속에서 우리는 먼바다의 외딴섬처럼 외롭고 고독해진다.

오래전 읽었던 한 배우의 인터뷰를 좋아한다. 당시 막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던 배우 김태리는 도망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언제든지 자신이 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모든 사람이 했으면 좋겠어요. 이거 하나가 정답이 아니거든요.”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도망칠 생각으로 임한다는 그 고백을 마음에 품은 지 어느덧 10년. 또다시 길을 잃은 듯한 무기력에 빠졌던 때에 영화 <절해고도>를 만났다. 영화는 그 옛날의 인터뷰와 비슷한 말을 내게 전해왔다. 다른 길로 가도 괜찮다고. 막힌 길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길이라고.

영화 <절해고도> 한 장면. /갈무리

영화 <절해고도> 한 장면. /갈무리

<절해고도>는 촉망받던 조각가에서 생계형 인테리어 업자가 된 아빠 ‘윤철’과, 미대 입시를 앞두고 돌연 출가를 선언한 딸 ‘지나’가 이야기를 이끈다. 남들의 시선에는 실패나 낙오처럼 보일 법한 삶의 변곡점 위에서도 그들은 슬픔을 과장하거나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이들을 직업적인 성공이나 학업 성취라는 좁은 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삶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이미 사회가 그어 놓은 선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보였던 건 아니다. 특히 윤철은 예술가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내비치면서 내 작업을 궁금해하는 이가 없다는 한탄을 하기도 하고,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 앞에서는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해 자칫 격해지기도 한다.

영화 <절해고도> 한 장면. /갈무리

윤철은 딸 지나가 출가하여 ‘도맹(道萌)’이라는 법명의 행자가 된 이후로 달라진다. 예술가로서의 미련이 남아 있던 작업실 대신 작은 국숫집을 열어 묵묵히 하루의 생계를 꾸린다. 동시에 딸이 머무는 암자의 일을 도우며, 아빠와 딸이라는 종속적 관계를 지우고 거사님과 행자님이라는 대등한 관계로 마주 대한다. 짧은 몇 마디 안에 지난 세월을 톺아보며 변해가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윤철의 눈빛에는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을 초연함이 서려 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절해고도의 뜻처럼 삶은 결국 홀로 감당해야 할 외로운 여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해가는 물길을 거스르려 애쓰지 않고 파도가 치면 치는 대로, 살이 깎이면 깎이는 대로 생을 품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스러지지 않을 단단함으로 저마다의 절경을 이룰 거란 생각에 이른다.

길 도(道), 싹틀 맹(萌). 도망이 아니라 도맹이다. 길을 잃었어도 괜찮고, 다른 길에 들어섰어도 괜찮다. 그 길은 분명 막힌 길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길이므로.

/전이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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