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반
엑셀하는 줄 알았더니…“상사 몰래” 기막힌 위장 주식사이트
중앙일보
28일 오전 9시반쯤 엑셀(Excel)로 위장한 주식 사이트에 약 1800명이 접속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시세와 관련 뉴스가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사진 '엑셀 코스피' 홈페이지 캡처
중학교 교사 서모(31)씨는 최근 엑셀(Excel) 화면처럼 위장한 주식 사이트에 빠졌다. 서씨는 “교무실에 있다 보면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 지나다니는데 주식 창을 보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민망했다”며 “일하는 척 주식을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는 “교사 월급도 얼마 안 되는데 요즘 성과급 얘기를 들으면 자괴감이 들어 투자에 더 빠지게 됐다”며 “업무 중에도 열 번은 들어가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업무 도중 몰래 주식 창을 볼 수 있게 위장한 사이트가 화제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업무용 스프레드시트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내 증시, 미국 증시, 코인 시세와 관련 뉴스가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메일함처럼 위장한 아웃룩(Outlook) 버전도 있다. 마치 상사가 보낸 메일 같은데 발신자는 ‘이재용(전자사업본부)’, ‘최지프 차장(하이닉팀)’, ‘정자동 부장(차량전략실)’이다. 메일을 열면 각각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의 시세가 나온다.
메일함처럼 위장한 아웃룩(Outlook) 버전도 있다. '이재용(전자사업본부)' '최지프 차장(하이닉팀)'에게서 온 메일을 열면 각각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시간 주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엑셀 코스피' 홈페이지 캡처
실시간 채팅 기능도 있다. 28일 오전 9시 30분쯤 접속자는 약 1800명. 이들은 “하이닉스 지금 들어가도 되나요”, “삼성전자 더 갈까요” 등의 내용으로 쉴 새 없이 토론했다. “회사 와서 본업은 안 하고 월급 루팡 중”이라는 자조도 적잖았다.
밤이나 주말에도 증시를 추적할 수 있는 ‘24시간 모니터링’ 사이트도 등장했다. 개인 투자자이자 사이트 개발자인 라오니는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에 “장외 시간이나 주말에는 가격 확인을 하기 매우 힘들었다”며 개발 이유를 설명했다.
이 사이트는 탈중앙화 파생상품 거래소 하이퍼리퀴드에서 거래되는 주식 연동 파생상품에 업비트의 테더(USDT) 원화 시세를 반영해 원화 환산 가격을 10초마다 보여준다. 투자자들은 새벽에도 주말에도 이곳에서 다음 거래일 시장 분위기를 가늠한다. 다만 암호화폐 기반 가격이 활용돼 실제 주가와는 차이가 날 수 있다.
“쇼츠보다 재밌어”…게임이 된 주식
전례 없는 불장에 주식이 일상 대화는 물론 업무 시간과 수면 시간까지 파고들고 있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 교수는 “부동산 규제 등으로 다른 투자 옵션이 없는 상황에서 진입 장벽이 낮은 주식으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며 “주가의 가파른 상승 자체가 투자자에게 도파민을 주고, ‘나만 뒤처지는 것 같다’는 포모(FOMO) 현상을 키워 전부 주식에 몰입하고 있다”고 짚었다.
코스피가 전 거래일 대비 43.41포인트(0.53%) 내린 8,185.29에 장을 마감한 28일 서울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가 업무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주식 앱과 커뮤니티가 결합하면서 주식이 일종의 놀이로 소비되는 양상도 나타난다. 최근 주식 앱은 단순한 주식 거래를 넘어 토론, 수익 인증, 응원 문화가 뒤섞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개인 투자자 전모(30)씨는 “요즘엔 쇼츠(유튜브의 숏폼 영상)보다 주식이 더 재밌다. 완전 도파민 대잔치”라며 “주가가 오르거나 떨어질 때마다 커뮤니티가 불이 나는데, 불안할 때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곧 오를 것’이라고 하면 안정제를 먹는 기분도 든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과잉 정보가 투자 판단을 흐릴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증권감독기구(IOSCO)는 최근 보고서에서 주식 앱의 실시간 가격 변동 표시, 푸시 알림, 수익률 배지, 커뮤니티와 같은 기능이 ‘투자의 게임화’로 이어진다며 “투자자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이런 기능이 투자자의 정보 접근성을 높일 수 지만, 최선의 이익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더 자주 거래하도록 유도해 위험을 인식하지 못한 채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적정선을 넘어 일하는 동안이나 24시간 내내 주식을 들여다보는 것은 일종의 중독 증세로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런 과몰입은 일상을 무너뜨리고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한국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18% 부족한데, 주식 과몰입은 피로 사회를 앞당기는 요인”이라며 “전문가들의 집중적인 진단과 개선 방안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장서윤 기자 jang.seo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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