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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휘은의 이상한 노이즈] 디지털 오디세이아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영생을 약속했다. 지상낙원 같은 섬에서 불로불사의 몸으로 평생 사랑하자는 유혹에도 오디세우스는 망망대해 너머의 집, 이타카를 염원했다. 그에겐 불멸의 안락보다 필멸의 의무가 더 중요했다. 이를 아내에 대한 충절이라고만 부르기엔 석연치 않다.

[반휘은의 이상한 노이즈] 디지털 오디세이아

인간의 흔적 살피는 알고리즘

오직 관찰과 추론만으로 완결

자아는 변수와 변화 쌓여 형성

피드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해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영생을 약속했다. 지상낙원 같은 섬에서 불로불사의 몸으로 평생 사랑하자는 유혹에도 오디세우스는 망망대해 너머의 집, 이타카를 염원했다. 그에겐 불멸의 안락보다 필멸의 의무가 더 중요했다. 이를 아내에 대한 충절이라고만 부르기엔 석연치 않다. 고향에서는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도 그도 늙어 죽을 것이다. 칼립소의 섬이 약속한 것은 몸이 변하지 않는 삶이었다. 그러나 이후가 없는 삶에는 돌아갈 곳도, 귀환이 없는 모험에는 근원도 없다. 오디세우스가 원한 집은 자신을 그대로 박제할 우리가 아니라 다시 시간 속에서 살아갈 숨을 불어넣어 줄 장소였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오디세이아’를 서구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자아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잘라내고 억눌러야 했는지 추적한 기록으로 해석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듣기 위해 돛대에 몸을 묶고 노 젓는 이들의 귀를 막았다. 노래를 듣는 이는 그쪽으로 갈 수 없고, 배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노래를 들을 수 없다. 욕망을 통제하고 자연을 계산하며 타인의 노동을 지휘하는 이 분할 속에서 두 철학자는 근대적 인간의 원형을 보았다. 목숨과 이름을 지킨 자아에는 자기 억제의 상처가 남는다. 자기 보존이 무엇을 보존하는지 잊는 순간이다.

반휘은 칼럼니스트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잃음으로써 자신을 발견했다. 자아는 모험에 앞서 완성되지 않고, 유혹과 공포, 판단의 실패를 거치며 비로소 형태를 갖춘다. 그러나 이타카에 닿았다고 해서 귀향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거지로 변장한 그는 궁전에서도 타인으로 남았다. 늙은 개 아르고스는 주인을 단번에 알아봤지만, 그의 유모는 흉터를 만지고서야 옛 주인을 확인했다.

페넬로페에게는 이름도 얼굴도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았다. 부부의 침대를 방 밖으로 옮기라는 그녀의 지시에 오디세우스는 그 침대가 땅에 뿌리박힌 올리브나무를 기둥 삼아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므로 누구도 옮길 수 없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만 아는 집의 구조를 말하고서야 그는 남편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인적 특징보다 함께 만든 장소의 기억이 그를 증명한 셈이다. 집은 낯선 모습으로 돌아온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관계를 이어 붙여 다시 알아 보이는 장소였다. 이렇듯 귀향에는 보관된 기억뿐 아니라 질문과 응답이 필요했다. 성장의 방향과 무관하게 사람은 늘 변화하고, 일생은 그 변화에 대한 누적된 적응기다.

추천 알고리즘 역시 흔적으로 사람을 알아본다. 검색과 클릭, 시청 시간은 디지털 세계의 흉터와도 같다. 다만 유모가 만진 흉터에는 오디세우스가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지만, 시청 시간에는 행동의 이유가 담기지 않는다. 서버에 저장된 정보는 과거의 나를 정립하고, 분류된 해석은 다음 화면의 순서를 정한다. 그 후의 선택은 다시 새로운 자료가 되어 피드로 돌아온다.

물론 우리는 기계적 추천으로 생각지 못한 음악과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다만 이용자가 무엇을 골랐는지와 플랫폼이 무엇을 고를 수 있게 제공하는지는 같은 차원의 선택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의심에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이용자에게 허락된 반론은 대부분 다시 클릭하고 넘기며 시스템이 새 결론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인간의 귀향은 상호 확인을 거치지만 알고리즘은 관찰과 추론만으로 완결된다. 알고리즘은 길을 차단하기보다 익숙한 길은 가깝게, 아직 도전할 길은 멀게 배치한다. 여기서 ‘나’는 결국 다음에 무엇을 볼지 계산하는 작업용 모형에 가깝다. 시스템에는 내가 왜 멈춰 보았는지보다 다시 멈춰 볼 확률이 더 중요하다. 그런 모형이 개인화라는 이름으로 시야를 되돌려 줄 때, 예측은 묘사에 머물지 않고 환경이 된다.

예외였던 행동도 다음 규칙의 재료가 된다. 아도르노가 ‘비동일적인 것’이라 일컫던, 기존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경험은 개인 안에서 오래 머물 틈을 얻기 어렵다. 사람이 변화하려면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관심과 우연, 변덕이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화를 겨냥한 알고리즘은 그 어긋남을 재빨리 해석해 일관된 취향과 기계적 반복으로 돌려놓는다. 낯선 노래를 오래 들으면 곧 비슷한 노래가 줄을 잇고, 화가 나서 지켜본 영상은 새로운 관심사로 번역된다. 디지털 피드는 사소한 변화를 즉시 정해진 값으로 분류해 기계적인 반복으로 만든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은 이미 추천을 초기화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개인화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용자가 원하는 것은 과거 전체의 삭제보다 세밀한 권한일 수 있다. 영상을 다섯 번 본 것은 동의가 아니라 분노 때문이고, 근 한 달 동안 아침마다 튼 노래는 취향보다 잠에서 깨기 쉬웠기 때문이라는 교정 말이다. 관심을 보였느냐 아니냐는 이진법에서 벗어나 뉘앙스까지 고려되기를 원하는 것. 자아는 그런 변수와 변화의 축적으로 형성된다.

오디세우스도 결심만으로 칼립소의 섬을 떠나지 못했다. 신들의 명령으로 칼립소가 그를 놓아주고 도구와 재료를 건넨 뒤에야 그는 뗏목을 만들 수 있었다. 귀향은 의지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피드를 떠나야 할 이유도, 낯선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할 의무도 없다. 다만 떠나고 싶을 때 과거의 내가 길목을 막지 않아야 한다. 침대의 비밀로 서로를 확인한 뒤에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는 바로 잠들지 않는다. 페넬로페는 그가 없는 동안 견딘 시간을 말하고, 오디세우스는 떠돌며 겪은 일을 처음부터 들려준다. 도착한 몸이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하고 누군가 들어줄 때 비로소 귀향은 끝난다. 이타카로 돌아온 이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떠났을 때와 같은 이름을 지녔어도 더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듯이, 인간에게 필요한 귀향은 옛날의 나로는 예측할 수 없던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다. 모든 클릭을 기억하면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자리는 내주지 않는 피드는 아직 우리를 알아보는 법을 모른다.

반휘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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