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 서강대 주임교수
[박혜진 서강대학교 AI⋅디지털자산 최고위과정 주임교수] 지난해 6월4일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후 ‘생산적 금융’은 경제 대도약을 위한 정책의 중심에 놓여있다.
부동산 등으로 흘러가는 비생산적 자금이 혁신 기업과 첨단 산업에 적재적소로 흘러가야 한다는 취지다. 150조 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가 발표되고, 지역의 숨은 혁신 기업 발굴의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선행 과제가 있다. 자금을 투입하고 싶어도, 제도권 금융이 닿지 않는 '공백 지대'에 갇혀 있는 기업과 자산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좋은 현금흐름이 있고, 성장하고 있고, 기초자산의 가치도 존재한다. 그런데 자금을 구하지 못한다. 바로 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 STO(토큰증권발행)다.
담보는 없고, 지분은 주기 싫은 기업들의 딜레마
전통 금융권의 문은 담보 없이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현금흐름이 좋아도 물리적 담보물이 없으면 은행 대출은 요원하다.
그렇다면 벤처캐피탈(VC)은 어떨까. VC는 지분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미 의미 있는 수익을 내고 있고,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검증해가는 중인 기업 입장에서 이 시점에 지분을 희석하는 것은 결코 유리한 선택이 아니다.
STO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STO의 핵심 메커니즘은 기업 전체의 지분을 건드리지 않고, 현금흐름이 좋은 특정 프로젝트나 자산만을 떼어내 이를 토큰 형태로 증권화하는 것이다.
기업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남기면서, 그 자산이 만들어내는 수익의 흐름을 시장에 내놓는다. 지분 희석도 없고, 담보도 필요 없다. 자산의 현금흐름 그 자체가 투자자에게 제공되는 가치가 된다.
한국의 음악저작권, 중소 수출기업의 매출채권, 지방의 우량 숙박·요식업 프로젝트, 유망한 1차 산업, 고성장 콘텐츠 IP까지. 현금은 나오고 있지만, 자금을 더 조달하면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자산들이 제도권 금융의 테두리 밖에 있다. 이것이 생산적 금융이 반드시 풀어야 할 실제 문제다.
사진=연합뉴스
STO가 여는 두 가지 문
STO의 진짜 가치는 단순히 '새로운 자금 조달 채널'에 그치지 않는다. STO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첫 번째는 자금 조달이다. 기초자산이나 프로젝트의 현금흐름을 토큰 형태로 증권화해 다수의 투자자에게 분산 공급할 수 있다. 지분 희석 없이, 담보 없이도 자산의 가치를 시장에 내놓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구조다.
스마트 컨트랙트를 통한 수익 배분과 조건부 권리 행사가 가능해지면서 기존 금융 구조로는 불가능했던 정교한 자금 조달 모델도 설계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마케팅이다. STO를 통해 일반 투자자가 특정 기업이나 프로젝트의 토큰을 보유하게 되면,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기업의 성장을 응원하는 이해관계자가 된다. 자신이 투자한 브랜드의 제품을 소비하고, 주변에 소개하고, 팬덤을 형성한다. 자금 조달과 충성 고객 확보가 하나의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VC 투자나 IPO에서는 얻기 어려운 고유한 효과다.
VC 시장의 '중간 심판관'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STO는 우리 벤처 생태계에서 오랫동안 부재했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바로 '시장에 의한 기업 평가'다.
지금의 벤처 투자 구조에서 기업의 가치는 소수의 VC와 전문 투자자들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이 판단이 틀렸는지 맞는지는 Series C, D(스타트업의 스케일업과정 중 후기투자 단계)를 지나 IPO 시장에 나왔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그 긴 여정 동안 시장은 침묵한다. STO는 이 침묵을 깬다.
기업이 STO를 통해 시장에 일찍 노출되면, 실제 투자자들이 그 자산의 가치를 판단하기 시작한다. 시장의 눈이 이른 시점부터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과대평가된 기업을 걸러내고, 저평가된 유망 기업을 일찍 발굴하는 효율적인 중간 검증 단계가 된다. IPO로 갈 수 있는 기업인지, 아닌지를 공개 시장의 냉정한 시선으로 미리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해외 유동성을 끌어오는 창구
STO의 가능성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증권은 24시간 전 세계 어디서나 거래될 수 있다. 국내 우량 자산을 글로벌 투자자에게 직접 공개하고, 해외 유동성을 국내 시장으로 끌어오는 채널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해외 자금을 국내 자산에 연결하려면 복잡한 펀드 구조나 상장 절차를 거쳐야 했다. STO는 이 장벽을 낮춘다. 대한민국의 우량 현금흐름 자산이 글로벌 자본시장에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인프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내 STO 시장이 오는 2030년까지 300~400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 잠재력의 절반이라도 실현되려면, 법제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자산을 STO로 구조화할 것인지, 어떤 기업이 이 시장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될 것인지, 그리고 이 시장이 단순한 조각투자 상품을 넘어 진정한 생산적 금융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설계하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진짜 과제다.
'생산적 금융'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STO가 담보도 없고 지분도 주기 싫은 기업들의 진짜 대안이 되는 날을 앞당겨야 한다.
박혜진 서강대학교 AI⋅디지털자산 최고위과정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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