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클리블랜드 유니버시티 서클 사무실 전경 /사진 홍승태 기자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도심 인근, 면적 1제곱마일(약 2.6㎢)에 불과한 구역 하나가 러스트벨트의 대표적 쇠퇴 도시였던 클리블랜드를 의료·문화·교육의 허브로 되돌려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구역을 관리하는 비영리기구 유니버시티 서클(UCI)의 케이트 보더스(Kate Borders) 회장과 매트 프로볼트(Matt Provolt) 기획·디자인 디렉터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기관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거버넌스 자체가 이 지역의 경쟁력”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니버시티 서클 조감도/ 사진 홍승태 기자
◆토지은행에서 시작된 70년
케이트 보더스 회장에 따르면 이 구역 안에는 비영리기관 40곳과 대학 3곳, 교회 3곳, 고교 2곳이 밀집해 있다. 미술관과 식물원, 오케스트라 같은 문화기관도 빼곡하며 일부는 100년이 넘었다. 도심에서 4마일, 호숫가에서도 불과 몇 마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는 유니버시티 서클에 대해 “문화에 훨씬 집중된 ‘제2의 다운타운’과 같다”고 소개했다. UCI는 ‘지구의 성장을 보호한다’는 비전 아래 자선단체 기부자들의 출연으로 1957년 설립돼 내년이면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케이트 보더스 회장은 “기부자들은 이곳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길 바랐다”며 “그래서 우리는 토지은행으로 출발해 기관들이 필요로 할 때까지 땅을 사들이고 보유했다”고 말했다. 설립 2년 차인 1959년에는 독자적인 경찰 조직도 만들었다. 그는 “대부분 지역에서는 시가 치안을 직접 담당하지만, 우리는 클리블랜드시와의 협약을 통해 시를 대신해 그 기능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자선과 협치가 지킨 러스트벨트
클리블랜드가 러스트벨트의 쇠퇴를 견뎌낸 원동력은 자선 문화였다는 게 케이트 보더스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록펠러(스탠더드 오일 창립자) 가문이나 웨이드(웨스턴유니언 공동창업자) 가문과 같은 부유한 가문들이 이곳 출신”이라며 “영리기업만큼 안정적인 수익원이 없는 이 기관들에 그들이 계속 재투자하지 않았다면 쇠퇴를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웨이드는 1882년 지금의 유니버시티 서클 땅 63에이커(25만4952㎡·7만7120평)를 시에 기부했다. 한때 록펠러 다음으로 부유한 클리블랜드인으로 꼽혔던 그의 후손들 역시 클리블랜드 미술관 건립 등에 대를 이어 기부에 나선 것이다. 클리블랜드 클리닉 같은 대형 병원과 지자체, 대학은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케이트 보더스 회장은 “기관 수장이 누구냐에 따라 협력의 온도차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각 기관이 개별적으로 고립돼 있었다면 결코 지금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UCI는 40개 기관장을 분기마다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모금·마케팅 등 같은 업무를 하는 실무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어피니티 그룹’도 운영한다. 일부 기관장은 UCI 이사회에도 참여해 접점을 넓히고 있다.
유니버시티 서클 내 위치한 대학병원 /사진 홍승태 기자
◆재정 네 갈래와 사람이 머무는 이유
재정은 크게 네 갈래다. 부동산 소유주에게 특별 부담금을 걷는 ‘평가지구’ 방식으로 연간 450만달러, 기부금으로 100만~150만달러, 기금 운용 수익으로 140만달러, 장기 토지 임대료로 100만달러가 들어와 전체 예산은 연간 1000만달러(한화 약 135억원) 규모다. 청년들이 걷고 싶어하는 활기찬 동네로 거듭난 배경에는 주거 전략이 있다. 케이트 보더스 회장은 “대학들이 만드는 활기는 원래도 있었지만, 주거시설을 늘리면서 유동인구가 함께 늘었다”며 “갓 임용된 병원 레지던트처럼 오가는 이들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동시에, 장기 정주를 어렵게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그는 “이 지구 안에는 집을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내 집을 마련하려면 인근 교외로 나가야 하는 게 현실적 한계”라고 인정했다. 안전 문제에 대해서는 통념과 다른 설명을 내놨다.
유나버시티 서클 창립자 엘리자베스 링 매더
한때 우범지역이었던 게 아니라, 위험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는 것이다. 그는 “설립자 엘리자베스 링 매더(Elizabeth Ring Mather)는 젊은 여성조차 이 거리를 안심하고 걸을 수 있길 바랐다”며 “여성의 눈높이에서 안전을 설계하면 남성의 안전은 자연히 따라온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지구 내 고등교육기관 3곳은 케이스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와 클리블랜드 예술대학, 클리블랜드 음악원이다. 케이스웨스턴은 1967년 케이스 공과대학과 웨스턴 리저브 대학이 통합해 출범했고, 클리블랜드 예술대학은 1882년 설립자 세라 킴벌이 자신의 거실에서 연 첫 수업에서 출발해 이 지구로 자리를 옮겼다. 클리블랜드 음악원은 1920년 설립돼 1961년 이곳에 정착했으며, 케이스웨스턴과는 1952년부터 공동 학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매트 프로볼트 디렉터는 “케이스웨스턴은 학생이 1만4000여명, 음악원은 700여명, 예술대학은 500여명 규모”라고 소개했다. 고등학교로는 1929년 지어져 2006년 재개관한 건물에 조기대학·과학수학·건축디자인 등 3개 특성화 학교가 함께 들어선 존 헤이 캠퍼스와 클리블랜드 예술고등학교 등이 있다.
케이트 보더스 유니버시티 서클 회장이 본보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김민환 기자
◆청년들이 머물고 싶은 도시
청년들이 이곳에 오래 머무는 이유는 도시의 포용력에 있다. 케이트 보더스 회장은 “도시 자체가 새로 온 사람에게 우호적이고 생활비도 적당해 정착하기 쉬운 편”이라며 “이곳에서는 원하는 곳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고, 무료로 열려 있는 미술관까지 수시로 들르며 거의 매일 라이브 공연을 즐기고, 문화와 맺는 유대가 삶의 일부가 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일 때문에 1~2년만 머물 생각으로 왔다가 정착한 사람을 수없이 만났다”고 덧붙였다. 클리블랜드 음악원 한 곳에서만 연간 500회 넘는 공연이 열릴 만큼 문화 접근성이 높다. 문화 인프라의 경제적 효과도 뚜렷하다. 케이트 보더스 회장은 최근 실시한 경제적 파급효과 조사를 인용해 “1제곱마일 구역 안에만 일자리가 3만개에 육박한다”며 “이 지역 일자리는 클리블랜드 평균보다 임금 수준도 높다”고 말했다. 매트 프로볼트 디렉터는 “학생 인구가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고, 매일 이 지역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만 6만명에 달한다”며 “이미 존재하는 이 활기를 어떻게 서로 연결하느냐가 우리 역할”이라고 거들었다. 클리블랜드 전역에서 호숫가와 수변시설을 앞세운 관광 활성화 움직임이 이는 가운데, UCI는 이 문화 자산을 ‘지역 단위를 넘어 미국 전역, 나아가 세계적인 목적지’로 키우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오송 바이오클러스터의 숙제
케이트 보더스 회장이 꼽은 가장 큰 도전은 뜻밖에도 협력 그 자체였다. 그는 “각자 막대한 모금 목표와 빠듯한 일정에 쫓기는 40개 기관을 계속 협력하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며 “기관 하나가 리더십 교체 등 내부 변화를 겪으면 한동안 연결이 끊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40개 기관을 아우르는 ‘우산 조직’이라는 태생적 위치도 걸림돌이다. 그는 “기부자들은 종종 이미 특정 기관에 기부하고 있다며 우리에게는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며 “반대로 우리가 모금에 성공하면 일부 기관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느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분기별 회의체와 특정 기관에 휘둘리지 않는 네 갈래 재원 구조는 이런 갈등 속에서도 UCI가 70년을 버텨온 힘이었다.
UCI의 70년은 충북 오송 바이오클러스터에도 적지 않은 숙제를 던진다. 오송에는 보건의료 국책기관과 바이오기업, 연구시설이 한데 모여 있지만 이들을 상시로 묶어낼 전담 조직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관장 회의와 실무자 모임을 정례화하고, 도 예산이나 특정 기관 출연금에 기대지 않는 독자 재원을 갖춘 ‘오송판 UCI‘를 고민할 때다. 정주 문제는 UCI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UCI가 주거를 늘려 사람을 끌어들이고도 내 집 마련이 어려운 게 한계라면, 오송은 아파트가 들어섰는데도 퇴근 시간이 지나면 거리가 비는 게 고질이다. 걸어서 닿는 미술관과 매일 열리는 공연이 청년을 붙잡았다는 보더스 회장의 설명은 오송이 채워야 할 빈칸이 어디인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UCI는 단체장 임기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내다보고 땅을 사고 조직을 꾸렸다. 오송에 필요한 것도 결국 그 시간을 견딜 제도다. 김민환·홍승태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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