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E 대표단, 삼성·SK하이닉스 생산시설 방문
AI 데이터센터 경쟁, GPU 넘어 HBM·D램 확보전으로
장기계약·선급금 논의…메모리 협상권 공급자로 이동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본사. 사진=연합뉴스
[포인트데일리 권상희 기자] 글로벌 인공지능(AI) 인프라 경쟁이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 확보전으로 번지고 있다.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선점하려던 빅테크의 경쟁은 이제 고대역폭메모리(HBM), 서버용 D램, 기업용 SSD 등 메모리 전반으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중동 국부펀드와 AI 투자기관까지 한국 반도체 생산시설을 찾으면서, AI 메모리 확보전은 기업 간 구매 경쟁을 넘어 국가 단위 공급망 경쟁으로 커지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UAE 정부와 주요 투자기관 대표단은 이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시설을 방문하는 일정에 나섰다. 대표단에는 UAE 투자부와 무바달라, MGX, 아부다비투자청(ADIA), G42, 코어42, 카즈나 데이터센터 등 AI·투자·데이터센터 관련 기관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13일 서울에서 열리는 '한-UAE AI 인프라 및 반도체 투자협력 포럼'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은 최근 글로벌 빅테크가 SK하이닉스에 보인 이례적 공급 확보 움직임과 맞물려 주목된다. 로이터는 최근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주요 글로벌 기술기업들이 SK하이닉스에 전용 메모리 생산라인 투자와 ASML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구매 비용 지원까지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고객은 장기 공급계약, 선급금, 가격 상·하단을 정하는 가격 밴드 방식까지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움직임의 배경에는 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이 있다. 대규모 AI 모델 학습과 추론에는 GPU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HBM과 서버용 D램, 저장장치가 대량으로 필요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1분기 실적 발표에서 향후 3년간 HBM 수요가 회사 생산능력을 초과할 것으로 전망했다. 1분기 매출은 52조6000억원, 영업이익은 37조6000억원으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모습. 사진=SK하이닉스
◇빅테크에서 중동 자본까지…AI 메모리 확보전 확산
과거 메모리 반도체는 경기 사이클에 따라 가격이 크게 출렁이는 범용 부품 성격이 강했다. 업황이 꺾이면 고객사가 가격 인하를 요구하고, 공급사가 재고 부담을 떠안는 구조였다. 그러나 AI 인프라 투자가 폭증하면서 구도가 달라졌다. 고객사가 먼저 장기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설비투자 지원까지 거론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중동 자본의 행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UAE는 AI와 데이터센터를 석유 이후 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다. 한국의 양대 메모리 업체 생산시설을 직접 찾는 것은 AI 인프라 구축 과정에서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국가와 기업 입장에서는 전력, GPU, 메모리, 저장장치를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며 "메모리는 이제 단순 부품이 아니라 AI 인프라의 핵심 병목"이라고 말했다.
◇공급자 우위 커졌지만 SK하이닉스는 신중
다만 SK하이닉스가 고객사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현재 SK하이닉스의 가용 생산능력은 사실상 없는 상태로, 특정 고객에게 추가 배정할 여력도 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고객 자금을 받아 생산라인을 짓는 방식은 단기적으로 투자 부담을 줄이고 수요를 보장받을 수 있지만, 특정 빅테크나 특정 국가 프로젝트에 물량이 묶일 경우 가격 상승기의 기회비용과 고객 종속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
업계의 관심은 SK하이닉스가 장기 공급계약과 고객 투자 지원을 어느 선까지 받아들일지에 쏠린다. 빅테크에 이어 중동 국부펀드까지 메모리 공급망을 직접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AI 시대의 병목은 GPU 하나에 그치지 않게 됐다.
업계 관계자는 "HBM과 서버용 D램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확보하느냐가 데이터센터 확장 속도를 가르는 변수가 되고 있다"며 "메모리 협상장의 무게추는 고객에서 공급자로, 개별 기업 거래에서 글로벌 공급망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