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리얼리? 유 윌비 스테잉 인 익산?” 한국어 공부를 위해 먼 타국에서 우리 학교 언어교육원을 찾은 한 남학생이 거처를 전북 익산에 잡았다는 말에 내가 놀라 묻는다. 서울에서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차로 이동해도 3시간은 족히 걸리는 곳에서 살 계획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아무리 꼼꼼히 준비하더라도 뒤통수부터 한 대 맞고 시작하는 것이 타향살이인데, 어쩌면 이리도 준비성이 없을까. 서울 지리를 대충은 살펴보고 왔었어야지. 처음에는 이런저런 생각에 가엾게 느껴졌지만, 곧 뒤통수를 맞은 것은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 친구는 처음부터 공부를 목적으로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다. 어학원에 등록해 한국행 비자를 취득하고, 막상 한국에 와서는 거리를 핑계로 어학원을 자퇴할 생각이었다. 그 사이 난민 비자를 신청하고, 임시로 발급받은 체류증으로 돈벌이를 하는 것이 그의 빅픽쳐. 그의 옆에는 한국에 정착한 동향 친구가 통역을 위해 앉았는데, 이기죽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마 그곳에서 한국으로의 탈출을 돕는 브로커가 아닐까. 몇 주 후 이들은 우리 어학원을 다시 찾아와 기어이 자퇴 신청을 하고야 만다. 한 학기 등록금이 몰수되지만 개의치 않는다. 한숨이 터진다. 한국 문화와 언어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출신국 가리지 말고 받아 보자는 우리의 선한 취지는 이렇듯 우리 땅에 불법체류자를 하나 더 늘리는 어처구니없는 결말을 맞이한다. 법무부에서 불법체류 확률이 높은 국가들을 고시하고 있건만, 이를 애써 무시한 순진함에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걸러 받을 걸.
출신국을 트집 잡아 누군가에게 차별을 가하는 일은 몰상식한 짓이다. 최소 우리는 그렇게 배워 왔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을 토대로 누군가에게 차별대우를 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그/녀의 내적 동기에서 의도된 말과 행위에 근거해 내려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도 현격한 개인차가 존재하며, 한 사람이 당신을 기만했다고 하여 다음 사람에게서도 같은 경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추상적으로야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어느 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과의 첫 경험이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지배적인 이미지로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녀의 체취, 식사 예절, 약속 지킴, 나를 대하는 말투나 신의 등에 대한 경험이 고정 관념이 되어 같은 국적의 다음 사람에 대한 기댓값으로 쓰인다. 이렇게 정형화된 이미지는 부정확한 편견이나 오해로 여겨져 대개 부정된다. 옳은 지적이다. 내가 만난 첫 번째 사람이 그 나라 사람 전체의 성향을 대표할 확률은 희박하다.
진릿값에 도달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만남을 무한히 반복하고 그때마다 그 국민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것. 그러나 무한 반복도, 고정 관념을 바꾸는 것도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불가한 일이다. 다만 한 국민에 대한 다수의 경험이 축적돼 수치화된 통계 데이터가 그 근사치 역할을 수행하며, 다음에 맞닥뜨릴 같은 국적을 가진 개인의 태도나 행동을 예측하는 데 기초 지식을 제공한다. 필자는 바로 이 확률을 무시해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한 것이다. 물론 운이 없던 탓도 있지만, 같은 국적을 가진 이들에게 모두 입학허가서를 내줬다면 다른 국적자들에 비해 훨씬 더 높은 확률로 불법체류자가 발생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통계적 지식은 우리 일상에서 외면받기 일쑤다. 2010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입법 추진되다가 연방정부의 중재로 대부분 무효화됐던 SB1070 법안이 대표적인 예다. 합법적으로 구금 또는 체포된 사람에 대해 그/녀가 외국인이며 불법체류자일 합리적 의심이 든다면 이민 신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법안의 골자로, 실제로는 외모나 억양, 스페인어 사용을 근거로 라틴계 주민들에 대한 선별적 의심을 제도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미 법무부는 이 법안을 인종 차별적 치안 활동으로 보고 애리조나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핵심 조항 대부분을 철회하도록 했다. 인종 차별에 대한 이념적 경계심이 법 집행에 있어 효율성 추구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건국 이념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본 판결은 물론 정의로운 것이었다 할 만하다.
그러나 통계치를 들여다보면 이 재판 결과가 과연 합리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2023년 미국 이민정책연구소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애리조나에 거주하고 있는 불법체류자는 30만7000여명. 이 중 멕시코(77%)를 비롯한 중남미 출신이 88%에 육박한다. 그렇다. ‘십중팔구’가 라틴계다. 머리가 띵하지 않은가. 집계 방식에 따라 수치가 다소 달라질 수는 있겠으나, 이 통계치에도 진실의 일부가 담겨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마다 멕시코를 통해 유입되는 불법체류자들로 골머리를 앓던 애리조나주 입장에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을 것이며, 합리적인 억제책 입안을 위해 이런 통계치를 활용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 법무부의 재판 결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추구를 위해서는 명백히 통계치로 나타난 우리의 선험적 지성을 무시해도 된다는 주문으로 해석할 여지마저 생겨난다.
지난 1월 한국에서 매우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장관, 국회의원, 시민단체 등 약 300명이 한데 모여 학벌 중심의 채용 관행을 법적으로 금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름하여 ‘출신학교채용차별방지법 국민운동’. 이들은 학벌에 의한 차별이 입시 경쟁과 사교육 부담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원인이라고 보고, 이를 금지함으로써 한국의 고질적인 교육·고용 문제를 동시에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몇 해 되지 않는 청소년기의 짧은 학업 경험으로 만들어진 학벌만으로 지원자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나온 마당에 출신 학교가 무슨 의미인가’ ‘미국 실리콘밸리에선 학벌에 상관없이 고졸이라도 유능하다면 채용한다더라’ 등이 논리의 핵심이다.
위에서 필자가 든 예들에 비해 더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위선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기 부정이라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의 학벌은 물론 유전자를 통해 물려받은 지능이나 부모가 가진 부(富)의 수준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본인의 의지와 노력, 성실성에 주로 좌우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국적에 의한 차별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비해 학벌에 의한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이 특히 더 저열하고 정치적인 이유다. 이들의 배우자와 자녀는 어떤 대학을 나왔을지, 이들이 맞게 될 사위나 며느리의 학벌이나 스펙을 알게 됐을 때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이런 주장은 ‘학벌’이라는 인덱스가 응축하고 있는 정보의 양이 제로(0)라는 전제가 성립해야만 가능한데, 독자도 알다시피 실제는 그렇지가 않다. 학벌에는 일정 수준의 지능, 무거운 엉덩이, 규칙이나 규범에 대한 존중 등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의 기본 요소가 이미 반영돼 있다. 더 나은 학벌을 가진 지원자가 더 나은 직장에서 일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고졸이나 지방대 출신이 서울 주요 대학 출신에 비해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확률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높을 것 같다.
학벌에 의한 차별 철폐는 어떤 이유에서건 이렇듯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부정하는 기이한 주장이다. 차별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무엇을 기준 삼을지에 대한 결정은 오로지 사용자에게 있다.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업의 성격에 따라 그것은 지원자의 학벌이 될 수도, 언변이 될 수도, 준수한 용모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생업과 관련이 먼 시민단체나 교육자, 정치인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차별의 철폐가 아니라 차별의 다양화다.
필자는 수강생들로부터 차별대우를 한다는 불평을 자주 듣는다. 원하는 바다. 열심히,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을 과할 만큼 티 나게 칭찬하는 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힘이다. 효과는 성적을 매길 때에 비해 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의욕이 엷었던 학생들이 질투심을 느끼며 조금씩 약진하기 시작하고, 궁극적으로 강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수강생은 늘어난다. 모두 차별대우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차별대우는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누릴 수도 있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이건만 우리 사회에서는 유독 전자에만 예민해 잔뜩 화가 나 있는 느낌이다. 아직이라면 독자도 이제 차별대우를 시작해 보시라. 누구에게나 무차별하게 친절한, ‘그저 좋은 사람’은 우리에게 어떤 힘도 의미도 없다. 누구에게도 친절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꾸준히 당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밝고 환한 웃음으로, 비난과 무례를 반복하는 이들에게는 무관심과 무표정으로 대응할 때 비로소 그대는 힘을 갖게 된다. 관계의 지형 역시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당길 수 있다. 한국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원동력, 지식과 데이터에 기반한 차별에서 찾아야 한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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