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4일 제16회 광주비엔날레 VIP 사전 개막식에 참석하였다. 주의 깊게, 그리고 성실하게 전시를 관람하였다. 그러나 실망을 안고 돌아섰다. 작품들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전시를 지탱해야 할 철학적 핵심이 공허했기 때문이다. 비엔날레의 주제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아르카익 아폴로의 토르소」 마지막 행에서 빌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철학적 사건으로 사유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슬로건으로 소비되었다.
시의 무게와 철학적 중력
1908년에 씌어진 릴케의 소네트는 서구 문학의 정전 가운데서도 구조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가장 대담한 작품 중 하나이다. 시가 묘사하는 토르소에는 눈이 없다. 부서지고, 머리가 없으며, 불완전하다. 그러나 릴케는 그것이 본다고 주장한다. 시선은 단 하나의 기관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돌의 존재 전체에 걸쳐 분산되어 있다. “그대를 바라보지 않는 곳은 없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하나의 존재론적 명제이다. 현존은 어떤 단독적 주체로부터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부터 발산된다.
마지막 행 -“Du musst dein Leben andern” /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의 힘이 아니라 판결의 힘을 지닌다. 어떤 논증도 그것에 선행하지 않으며, 어떤 지침도 그것에 뒤따르지 않는다. 부서진 돌이 그저 명한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단순히 감동이나 미적 쾌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개시(開示)한다. 그것은 존재의 진리 -하이데거가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이라 부른 것-를 열어젖힌다. 이 만남은 관람자를 갑작스러운 노출 속으로 던진다. 당신은 당신이 될 수 있는 것과의 대비 속에서 당신 자신에게 드러난다. 명령은 미적 흥분이 아니라 존재론적 개시(開示)로부터 온다.
스탠리 카벨은 같은 영역에 다른 각도로 접근하면서 이를 인정(acknowledgment)이라 부를 것이다. 아름다운 대상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당신을 붙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당신이 솔직하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것. 토르소의 명령은 바로 이 붙잡음의 행위이다. 그 권위는 완전성이 아니라 집중된 존재로부터 온다. 파편은 온전한 조각상보다 더 완전하고 더 현존한다. 주변적인 것은 모두 벗겨지고, 발산하는 핵심만이 남는다.
호 추니엔이 말한 것, 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
예술감독 호 추니엔은 기자회견에서 릴케의 행을 “프로그램 없는 요구”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렇게 부연하였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왜,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치명적으로 얕다. 그것은 시의 수사적 표면 -문법적 개방성, 내용의 미지정- 에만 머물 뿐, 철학적으로 진지한 독해라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훨씬 더 까다로운 질문을 외면한다. 머리 없는 돌 토르소가 이 명령을 내릴 권위를 도대체 어디서 얻는가? 사물이 우리를 이렇게 붙잡으려면 어떤 존재 양식을 가져야 하는가? 그 질문 -하이데거적 질문, 예술 작품의 진리-개시(開示) 능력에 관한 질문- 은 호 추니엔의 큐레이토리얼 프레임워크에서 완전히 부재한다. 그 자리를 사회학적 그라데이션이 채운다.
비엔날레는 다섯 개의 방으로 구조화된다. 「분자와 나」, 「몸과 유대」, 「풍경과 배움」, 「우주와 변화」, 「공기와 발화(發話)」. 변화는 분자적 차원에서 우주적 차원까지 “다양한 규모와 속도”로 펼쳐진다고 우리에게 말해진다. 제주 화산암은 전시의 “가장 오래된 참여 작가”로 제시되며, 변화가 얼마나 느리고 지각하기 어려울 수 있는지를 지질학적으로 증명한다. 흥미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릴케의 몸짓이 아니다. 릴케는 당신에게 현무암의 점진적 변화를 성찰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살고 있는 삶의 적나라한 불충분함을 당신 앞에 들이민다 -관람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 시는 완만한 연속이 아니라 단절의 사건이다. 호 추니엔은 릴케의 가장 충격적인 행을 안락하게 만들었다.
집중의 아이러니
여기에 고통스러운 아이러니가 있다. 이번 비엔날레는 하나의 진정으로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적은 수의 작가 -43팀- 를 초대하고, 전시 전체를 단일 공간에 집중시켜, 더 많은 작가, 더 많은 공간, 더 많은 작품이라는 “팽창 모델”을 거부하였다. 호 추니엔은 팽창이 아닌 “집중과 역량”을 말했다. 이것은 실제로 시 자체와 미학적으로 공명한다. 토르소의 힘은 정확히 그 불완전함으로부터, 부서졌지만 발산하는 핵심으로의 집중으로부터 온다. 파편으로서의 완전성; 목록의 망라성이 아닌 구조의 충분성. 호 추니엔은 이렇게 릴케의 미학적 논리 중 한 차원을 포착하여 큐레이토리얼 원리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었다. 전시 설계 전략으로서의 집중은, 진정한 비은폐(非隱蔽)의 존재론적 폭력과 같지 않다. 전자는 만남의 유쾌한 강도를 산출하고, 후자는 ‘당신은 -마땅히 혹은 아마도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경험을 산출한다. 비엔날레는 전자를 제공하면서 후자의 수사를 빌린다.
광주는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이 철학적 얕음을 진정으로 안타깝게 만드는 마지막 고려가 있다. 광주는 추상적인 도시가 아니다. 5·18의 도시이다 -1980 년 5월 18일, 시민들이 군사독재에 맞서 봉기하였다가 학살로 응답받은 그 도시.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명령에 이 도시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피로써 응답했다. 비엔날레는 이것을 인정한다. 오월어머니집은 그 사건으로 삶이 산산조각 났다가 다시 세워진 여성들이 그린 322점의 그림을 선보인다. 그러나 역사적 무게에 대한 인정과, 전시의 주제를 떠받치는 작품에 대한 철학적 진지함은 서로 다른 것이다. 5·18의 유산은 비엔날레 안에서 도덕적 중력으로 존재하지만, 릴케의 존재론적 명령과 진정한 철학적 접촉 속으로 가져와 지지는 않는다. 결과는, 두 개의 깊은 원천 -위대한 시 하나와 위대한 비극 하나-의 권위를 빌리면서도 그 어느 쪽도 온당히 감당하지 못한 비엔날레이다. 릴케의 토르소는 눈 없이 바라본다. 그것에 의해 무너질 준비가 된 관람자를 고요하고 인내 있게 기다리면서. 올 가을 광주에서, 큐레이터들은 움츠러들었다.
홍가이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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