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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관객이 길을 잃도록 했죠”…XR로 경계 허문 ‘블러’ 연출 크레이그 쿠인테로

연극 연출가의 주문치고는 독특하다. 작위적인 연기 대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관객의 마음을 열라는 의미다. 관객들에게는 “그냥 와서 경험하라”고 당부했다. 지난 13일 서울 동숭동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에서 만난 연출가 크레이그 쿠인테로(57)의 이야기다.

“배우들에게 ‘연기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난 13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에서 만난 크레이그 쿠인테로. 확장현실(XR) 작품 ‘블러: 경계가 흐려질 때’ 연출가로 한국을 찾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 연출가의 주문치고는 독특하다. 작위적인 연기 대신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관객의 마음을 열라는 의미다. 관객들에게는 “그냥 와서 경험하라”고 당부했다. 지난 13일 서울 동숭동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에서 만난 연출가 크레이그 쿠인테로(57)의 이야기다.

그는 가상현실(VR)과 배우의 퍼포먼스를 결합한 확장현실(XR) 작품 ‘블러: 경계가 흐려질 때’를 연출했다. 지난해 대만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같은 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이머시브 경쟁 부분에 올랐다.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오는 16~17일 서울 동숭동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국내 관객을 만난다.

대만 타이베이 리버베드 시어터 컴퍼니의 예술감독인 쿠인테로는 VR·XR 등 신기술을 공연 언어로 적극 활용하며 세계 공연계에 이름을 알렸다. 2022년 자신의 첫 VR 작품 ‘올 댓 리메인즈(All That Remains)’로 이듬해 룩셈부르크 영화제 최우수 몰입형 경험상을 받았고, 2023년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로 캐나다 최고(最古) 독립영화제인 페스티벌 두 누보 시네마에서 파노라마상을 수상했다.

쿠인테로는 “‘블러’는 삶과 죽음, 현실과 가상, 너와 나, 기억과 미래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아이를 잃은 한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 작품의 시작점은 멸종한 털매머드를 복원하려는 과학자들의 시도를 다룬 2022년 기사였다. 쿠인테로의 상상은 인간 복제로 뻗어갔다. 그는 “이미 반려동물의 유전자를 복제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인간 복제는 가능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쿠인테로는 ‘블러: 경계가 흐려질 때’는 공연은 영화와 다른 생생함이 있다. AI 등으로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블러’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공학의 가능성과 윤리적 딜레마를 파고든다. 쿠인테로는 “2018년 미국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세상을 떠난 반려견의 유전자로 복제견을 만들었다. 상실감이 컸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자식을 잃은 부모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헤아렸다”고 말했다.

작품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쿠인테로는 “관객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블러: 경계가 흐려질 때’ 공연 장면. PHI스튜디오

이를 위해 그는 VR 기술과 배우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결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문다. 관객은 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 속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를 지나는 듯한 경험을 한다. 쿠인테로는 “관객이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며 “그 과정을 거치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블러: 경계가 흐려질 때’ 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기술의 가능성과 윤리적 딜레마를 다룬다. 사진 You-Wei Chen

그가 배우에게 ‘연기하지 말라’고 주문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정해진 인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배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관객과의 경계를 허물기 위함이다. 그는 “배역 같은 것에 숨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며 “자신의 나약함까지 보여줄 때 관객의 마음을 열 수 있다. 그 지점을 넘어서면 배우도 훨씬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쿠인테로는 ‘블러: 경계가 흐려질 때’에 대해 “다른 이머시브 공연과는 또다른 경험을 관객에게 제공할 것” 이라고 자신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된 작품이지만 쿠인테로는 ‘블러’를 연극에 가깝다고 정의했다. 영화에서 찾기 어려운 생동감(Liveness)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많은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와 같이 분명한 선악 구도나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를 원하지만, 예술은 그보다 훨씬 다양한 경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블러’를 보고 무언가를 얻어가겠다고 생각하기보다 그저 와서 경험했으면 좋겠다”며 “100명이 공연을 본다면 100개의 해석이 나왔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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