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회 여공에서 노동자로
사진은 여러 가닥의 굵은 목화 실타래를 조금씩 질기고 가는 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제공. 출처:오늘의 전남(1979년)
일제강점기 임동방직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식민지 자본이 필요로 하는 값싼 노동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수탈과 차별을 수동적으로 감내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는 공장을 직접 관리하려는 움직임에 참여했고 노동조합과 노동자 교육, 조직적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 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을 거쳐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됐다.
1935년 가동을 시작한 일본 종연방적 광주공장은 수천명 규모의 노동자 집단이 형성된 공간이었다. 당시 광주에서 대규모 공장이었던 전남도시제사공장, 약림제사, 종연방적 제사공장 등과 비교해 규모와 자본금 측면에서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노동 조건과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은 하루 12시간, 일주일 단위로 주야 근무 체계가 바뀌는 구조였다. 휴무는 한 달에 3번 주어졌다. 병영을 연상시키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은 노동 이외의 시간까지 옭죄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 생산체계가 강화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와 노동 강도는 더욱 세졌다. 악조건에서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해 충분한 보상은 없었다. 일본인 노동자들과 똑같은 일을 해도 임금의 경우 일본인은 월급제인데 반해 조선인은 일당 형식의 노무자로 취급됐다. 조선인 여성 노동자는 가장 낮은 계층이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는 지역 섬유업체를 비롯한 호남전기 등 사업장 노동자들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현장에 함께했다. 사진은 80년 5·18 당시 광주 호남전기 여성노동자들이 시위에 참여한 모습. 5·18기념재단 제공. 출처: 책자 그리운 5·18 투사 김성애·로사리아.
1936년 조선일보에 소개된 기사에 따르면 여성노동자는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25전을 받았다. 1년 이상 경과해 숙련 노동자로 인정받으면 하루 27전을 받을 수 있었다. 하루 식비 15전을 공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훨씬 적었다. 조선인 유년 여공의 평균 12시간 임금 수준인 30전에도 못 미쳤다. 임금뿐 아니라 직급과 기술직 진출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이 뚜렷했다.
강이수의 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 ‘1930년대 면방대기업 여성노동자 상태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35년 8월 종연방적 광주공장의 종업원 현황을 보면 직원은 일본인 123명, 조선인 7명으로 구성됐다. 최고 기술자로서 직원 대우를 받은 일본인이 98명인데 반해, 조선인은 3명에 불과했다. 반면 노무자는 조선인 2천470명이고 일본인은 10명이었다. 공장을 돌리는 사람은 조선인이었지만 공장을 관리하고 기술을 장악한 이들은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광주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61년 창립돼 지역 산업 현장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의 가치 등을 다시 인식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5년 일신방직과 전남방직 등 각 회사 JOC 대표들이 모여 토론을 하는 모습. 김복자씨 제공.
당시 차별적인 일제 자본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저항은 임동공장이 들어서기 전부터 시작됐다. 1932년 11월 전남도시제사공장 여공 500명이 대우 개선과 임금 인상 요구 등을 내걸고 총파업을 했다. 당시 공장에는 낮은 임금과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각종 벌칙이 존재했다. 회사 측은 임금 인상을 제외하고 요구 조건을 수용한 것으로 기록됐다. 10일 후에는 종연방적 제사부 여공 300명이 파업을 했다. 이 사건은 노동자 10여명이 퇴직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종연방적 가동 전 발생한 두 사건은 광주 지역 섬유산업의 성장과 함께 여성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권리 요구가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동공장에서도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기숙사 생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였다. 공장 안팎에서는 독서회와 비밀조직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 등 노동자 조직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광주시사에는 ‘일제강점기 방직공장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 사회주의 계열 노동운동의 영향, 공장 내 비밀조직과 독서회 활동,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 경찰의 감시와 탄압 등이 다뤄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공장 내 노동 통제는 단순한 생산관리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회사에 일본 헌병이 상주하고, 형사 출신 직원이 필적감사를 하는 등 노동자들의 일상과 사상까지 감시하는 체제로 확대됐다.
그러나 저항의 움직임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과 차별은 문제의식, 식민지 지배의 반감으로 표출됐다. 1942년 종연방적 노동자 ‘김초암 사건’은 눈에 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김초암은 1942년 5월 기숙사 사감이 징병제에 대한 감상문을 쓰게 하자 가명으로 징병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작성해 제출했다. 이후 체포돼 194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1945년 해방은 임동 방직공장 노동자들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일본인 경영진과 기술자들이 물러난 공장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시설을 관리하고 운영하려는 활동이 두드러졌다. 일제강점기 공장의 생산을 책임지면서도 관리와 기술 영역에서는 소외된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의 주체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자주관리 경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일본인 소유 공장시설이 미군정 관리 아래 들어가 자율적 운영에 제약을 받았다.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노동자들은 심각한 물가 상승과 식량난, 불안정한 노동 상황에 맞닥뜨렸다. 1946년 9월 전국으로 확산된 총파업은 많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폭발했다. 광주지역에서도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권리 요구가 표출됐다.
해방 이후 노동자들의 주장은 단순히 임금을 더 받는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공장 운영에 참여하고 일자리를 지키며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겠다는 목소리로 확대됐다.
1947년 회사 출입과정에서 실시되던 검신 제도가 폐지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노동자들의 몸과 소지품을 검사하던 공장 내 통제 관행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해방은 공장의 소유주와 운영 체계가 바뀌는 변화뿐 아니라 노동자들에게도 자신의 노동과 권리, 공장 운영에서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였다.
대규모 여성 산업노동자의 역사는 해방 이후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으로 이어졌다. 1960~1970년대 광주지역 섬유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계속됐다. 1958년 조직된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영향이 컸다. JOC는 직장별 팀을 만들어 학습과 토론을 통해 젊은 노동자들이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로서 인식을 높여갔다. 1961년 11월9일 김종남 신부 지도로 창립된 광주 JOC는 일신방직과 전남방직 노동자 등 15명이 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1970~1980년대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로케트전기 등 소그룹 학습과 노동자 모임을 통해 사회구조와 노동조건의 문제를 인식하고 서로 연대하는 응원군이었다.
1974년 일신방직에 입사했다가 1977년 퇴사한 뒤 JOC 간사로 활동한 김복자씨의 기억은 당시 노동자들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김씨는 방직공장에 들어갔을 당시가 박정희 독재 정권의 시절이었으며, 일할 직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구조적인 모순을 알면서도 묵인하던 시대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후 JOC 활동과 노동운동을 접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새롭게 바라보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식하게 됐다고 기억했다.
광주에서는 1970년대 광주가톨릭노동청년회가 구성돼 섬유, 전자 등 열악한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도왔다. 1978년 JOC 광주 관구 훈련회. 김복자씨 제공.
노동자들의 노동 교육 활동은 개인의 의식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과 연대,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요구하는 기반이 됐다.
광주지역 여성 노동자들의 활동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서도 확인된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을 비롯한 많은 사업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시위에 참여하거나 시민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음식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항쟁에 힘을 보탰다.
특히 노동자 교육과 연대 활동을 통해 형성된 인적 관계는 일부 여성 노동자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안진 전남대학교 교수의 논문 ‘5·18항쟁기 여성피해 진상규명의 과제’(인권법 평론, 제25호, 2020)에 따르면 1980년 5월18일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등 광주지역 여러 사업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논문에는 당시 60명가량이 교육에 참가했으며, 이들 상당수가 이후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JOC 여성 노동자들은 5월항쟁때 거리에서 시위에 참여하거나 물품 보급과 지원 활동에 나섰다. 공장 안에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고민했던 여성들이 공장 밖에서는 시민으로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현장에 함께했음을 보여준다.
1980년 이후에도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는 계속됐다. 1989년 전남방직 집단해고 반대 투쟁과 1990년을 전후한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은 고용 안정과 노동권을 둘러싼 요구가 계속됐다.
전남방직 해고 반대 투쟁은 광주지역의 저항 문화와 예술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극단 토박이의 고(故) 박효선씨는 전남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부당해고와 항쟁 사태를 모티브 삼아 노동연극 ‘시다의 노래’를 창작, 무대에 올려 반향을 일으켰다.
임동방직공장은 일제강점기 종연방적 시절부터 해방 후까지 각 시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저항의 방식은 달랐다. 그러나 더 나은 대우와 인간다운 삶을 향한 요구는 공통적인 화두였고 세대를 넘어 이음줄을 이어왔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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