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 R&D 예산 이재명 정부, 산업계 비중 역대 최저
투자 세계 2위 한국, 혁신·확산·연결망 OECD 최하위
AI 쇼크에 미·중·일 설계 구조 개혁, 한국만 반복구조
미·중·일 산업계 의사결정자 국가전략 설계 참여
지난해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고 생중계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가 과학기술계는 물론 국민들 사이에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2025년 10월, 젠슨 황이 한국을 찾았다. 엔비디아 CEO인 그는 국내 대기업 총수, 대통령을 만나 반도체 협력을 논했고, 한국 AI 생태계에 대한 기대를 쏟아냈다. 며칠간 한국의 뉴스는 그 장면으로 채워졌다.
지난 3월 워싱턴에서 그는 미국 대통령 앞에서 AI 국가전략을 직접 자문하는 설계자로 앉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 명단에 젠슨 황을 비롯해 마크 저커버그, 래리 엘리슨, 리사 수, 서게이 브린 등을 임명했다. 기술 경쟁의 최전선에서 실제 의사결정을 내려온 사람들이 국가 전략의 중심 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국정에 경영DNA를 접목하는 것이다.
한국의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민간위원 명단에도 관심이 쏠렸다. 지난 2월 임명된 과기자문회의 민간위원 20명 가운데 산업계 인사는 아쉽게도 10%에 불과했다. 박근혜 정부 이후를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였다.
대덕넷이 지난 12년간 위원 구성을 전수 분석한 결과, 교수 중심 구조는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알파고 쇼크 이후 10여 년 동안 교수 비중은 평균 50~60%정도를 유지했고, 산업계는 10~20%대에 머물렀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 기조가 달라져도 자문 테이블의 구성은 사실상 고정돼 있었다. 물론 임명된 자문위원, 교수진 모두 각 분야 전문가로 충분히 인정받는다. 그러나 과학기술 전쟁 시대에 교수진 중심의 과기정책 설계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게 사실이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헌법 제127조 3항에 근거해 설치된 대통령 직속기구이다. 1991년 3월 상설기구로 발족하고 2004년 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직접 의장을 맡으며 위상이 강화됐다. 2018년 심의의회를 통합해 자문과 심의 기능을 맡는 과학기술 정책의 방향과 실행의 최상위 기구라 할 수 있다.
◇ 교수 50~60%, 10년 이상 반복된 구조
이 구조는 단순한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자문 테이블에 어떤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앉아 있느냐에 따라 정책의 구조와 방향이 결정된다. 연구자는 논문, 특허, 피인용 지수로 성과를 정의한다. 산업계의 언어는 시장 점유율, 공급망 지배력, 제품화 성공률로 기술의 가치를 판단한다. 두 언어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지만, 한국의 자문 구조에서는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내세웠지만 1기(2013~14년) 자문위원의 65%는 교수였고, 분과의장 세 자리는 모두 대학 총장 또는 학술원장이 채웠다. 기업인도 참여했지만 의제를 설정하는 중심에는 서지 못했다. 의제를 설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설정된 의제에 응답하는 자리였다. 구성의 다양성과 구성의 실질은 다른 문제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여성 과학자 비중이 늘었다. 의미 있는 진전이었지만 다양성은 성별에 머물렀고, 산업 현장의 경험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1기·3기·4기의 대학 비중은 67%로 박근혜 정부 일부 기수보다 오히려 높았다. AI·그린뉴딜 예산이 역대 최대로 편성된 4기(2021~22년)에도 실제 AI 비즈니스를 운영해본 인사는 자문 테이블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AI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문했다는 말이 아니다. AI 비즈니스의 언어, 시장의 언어, 실패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 1기(2022~23년)에서는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장, SK텔레콤 임원 등 대기업 현직이 심의위원으로 합류하며 산업계 비중이 25%에 올랐다. 그러나 2023년 R&D 예산 삭감 과정에서 자문 기구는 실질적인 완충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산업계가 테이블에 앉아도 구조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재명 정부 1기의 산업계 비중은 다시 10%로 낮아졌다. 35조 원의 R&D 예산을 편성하고 반도체·AI·바이오를 3대 핵심 국정과제로 내건 정부가, 그 산업의 현직 경영인 없이 자문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재명 정부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출범이후 처음으로 회의를 실시간 공개하며 투명성 측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구성의 다양성과 실질적 영향력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반복된 이 구조는 검증된 인물 중심의 안정성이라는 장점을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시각과 현장 감각이 유입되지 않는 폐쇄성이라는 한계를 낳는다. 특정 이름들이 정권을 넘어 반복된다. 어떤 교수는 연임을 거듭하며 10년 가까이 자문 체계의 핵심에 자리했다. 이것을 전문성의 연속성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인적 네트워크의 관성으로 읽을 수도 있다.
◇ 투자는 세계 2위, 전환은 왜 꼴찌인가
OECD 혁신정책 리뷰(2023년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4.93%로 세계 2위다. 이스라엘 다음으로 높으며, 미국(3.45%), 일본(3.44%), 독일(3.32%)을 크게 앞선다. 그러나 같은 보고서는 R&D 지출 세계 2위임에도 AI, 바이오 등 핵심 분야에서 여전히 패스트 팔로워에 머물러 있으며, 고위험·고수익 연구보다 안전한 연구에 집중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한국 특허 중 외국인 공동발명자가 포함된 비율은 2.4%로 OECD 최하위다. 세계 4위 특허 출원국이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혁신 생태계를 갖고 있다. 기업이 조달한 R&D 예산 중 대학 수행 비율은 1.7%, 정부연구소 수행 비율은 0.8%에 불과하다. 기업은 연구비의 97.7%를 자체 집행한다. 산업-학계 공동 논문 발표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다. GDP 세계 15위 나라의 유니콘 기업 수는 22개인데, GDP 27위인 이스라엘은 23개다.
투자는 증가하지만 협력은 줄어드는 구조, 성과는 쌓이지만 확산되지 않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설계 구조의 문제로 읽힌다. 시장의 언어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기술의 방향이 수요가 아닌 공급 중심으로 설정되기 쉽다. 그 결과 기술은 개발되지만 시장에서의 경쟁력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단절이 발생한다. OECD의 발표 자료는 21년 기준이지만 이는 지속적으로 지적되는 한국의 문제이다.
◇ 세계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경쟁국들은 과학기술 전략의 설계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2기 PCAST는 극단으로 갔다. 13명 위원 중 대학 연구자를 1명만 두고 나머지를 모두 테크기업 CEO로 채웠다. 산업계 비중 92%다. 클린턴부터 바이든까지 PCAST의 산업계 위원은 주로 최고기술책임자(CTO)나 연구부문장이었다. CEO 중심 구성은 트럼프 2기가 처음이다. 학계는 즉각 반발했다. 네이처는 생물학자가 단 한 명도 없다며 바이오테크 시대에 미국이 극도로 취약해졌다고 경고했다. 정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논리도 단순하지 않다. 기술 패권 전쟁에서 정책이 현장보다 늦으면 진다. 그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설계자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면서 다른 쪽의 취약성을 만들었지만, 그 방향성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본 종합과학기술·이노베이션회의(CSTI)는 균형을 유지한다. 총리가 의장을 맡고, 민간위원은 학계 40%, 산업계 40%다. 미즈호 파이낸셜그룹 시니어 어드바이저와 도쿄대 교수가 같은 무게로 앉는다. 이 기구의 자문은 예산에 직결된다. 일본 반도체 전략, 양자컴퓨팅 로드맵, 탄소중립 R&D 계획이 CSTI를 거쳐 예산으로 전환됐다. 자문이 실행에 닿는 구조다. 위원 임기는 3년이며 국회 동의를 받는다. 내각이 바뀌어도 위원 구성이 급격히 뒤집히지 않아 정책의 연속성이 유지된다.
중국은 2023년 당 직속 중앙과학기술위원회(CSTC)를 신설했다. 기존 과학기술부 위에 당이 직접 통제하는 상위 기구를 올려놓은 것이다. 첫 업무회의에 중국과학원장, 공정원장과 함께 인민해방군 해군 제독이 동석했다. 군사·민간·기초연구·응용기술이 하나의 테이블에 통합됐다. 구성원 명단은 공개되지 않는다.
세 나라는 각기 다른 방식을 택했지만 공통적으로 '누가 설계하느냐'에 대한 답을 바꾸고 있다. 한국은 이 스펙트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우려되는 이유다.
◇ 왜 한국은 구조가 바뀌지 않는가
이 구조가 지속되는 데는 몇가지 문제가 지속된다는게 과학계의 중론이다. 첫째는 추천이다. 과기정통부 실무진이 위원을 추천할 때 가장 안전한 선택은 여러 정부 위원회를 거친 검증된 이름이다. SCI 논문 실적,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 여부, 위원회 경력 등 이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은 압도적으로 교수다. 기업인을 추천하면 이해충돌 우려와 정치적 논란이라는 부담이 따른다. 정권이 바뀌어도 실무 관료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둘째는 예산 구조의 관성이다. 국가 R&D 예산의 70% 이상이 대학과 출연연으로 흐른다. 과기자문회의는 이 예산의 방향성을 자문하는 기구다. 예산의 주요 수혜자들이 예산의 방향을 설계하는 구조다. 기업이 연구비의 97.7%를 자체 집행하는 현실에서, 자문 테이블에 기업 현장의 언어가 없다면 정부 예산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자원이 집중된 곳으로 계속 흐른다.
셋째는 자문의 실질성 부재다. 자문 결과가 정책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추적되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가 회의를 실시간 공개하기 전까지, 무엇을 권고했는지조차 공개된 적이 없었다. 이런 구조에서 현장의 가장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내기는 어렵다. 자문회의의 영향력이 낮아지며 거수기라는 오명과 함께 악순환이 재생산 된다.
임기 구조의 문제도 들여다볼만 하다. 현행 민간위원 임기는 1년이다. 정책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는데, 1년 임기에 실질적 자문 결과를 내기란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결국 이미 행정 언어에 익숙한 교수들이 자연스럽게 선호된다. 일본 CSTI 민간위원 임기는 3년이며 국회 동의를 받는다. 미국 PCAST는 행정명령 기준 2년이며 정권이 바뀌면 기구 자체를 새로 구성한다. 한국의 1년 임기는 두 모델의 장점을 모두 갖지 못한다. 일본처럼 전문성을 축적할 시간도 없고, 미국처럼 새 정권의 철학을 선명하게 반영하지도 못한다.
◇ 한박자 늦는 자문 테이블
2023년 가을, 이 구조의 취약성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겠다."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온 대통령의 발언 한마디로, 수개월에 걸쳐 준비된 예산안이 두 달 만에 전면 재조정됐다. IMF 외환위기 때도 줄지 않았던 R&D 예산이 33년 만에 삭감됐다. 전년 대비 16.6%, 5조 2000억 원이 줄었다. 2024년 연구책임자는 11% 감소했고, 국가 R&D 과제 수는 13% 줄었다. 출연연 연구자 1인당 연구비는 1년 사이 24% 감소했다. 연구 인프라가 뿌리에서 흔들렸다.
이 사태는 두 가지 구조적 결함을 동시에 드러냈다. 하나는 대통령 발언 하나가 전문적 검토 과정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 즉 자문 기구가 실질적 완충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눠먹기'의 실체를 검증하거나 반박할 시장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자문 구조 안에 없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계가 삭감에 맞설 수 있는 논거의 자원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것이다.
기술 동맹과 표준 선점은 이미 민간 네트워크에서 먼저 결정된다. TSMC의 애리조나 공장, 오픈AI와 소프트뱅크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핵심 결정들은 정상회담 의제가 되기 전에 기업인들 사이에서 방향이 잡혔다. 현장 기업인이 자문 구조의 주변부에 머무는 한, 공급망 충격이 정책 의제로 부상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경쟁국보다 길어진다.
실제 AI 분야에서 한국은 우수한 연구 역량에도 글로벌 플랫폼 경쟁에서는 존재감이 제한적이다. 연구 역량과 시장 경쟁력 사이의 단절. 이것이 자문 테이블의 구성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과학기술 정책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처방은 세 가지다. 첫째, 산업계 비중을 법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재량에 맡기는 한 다음 정권은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간다. 실제로 매번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트럼프 2기 PCAST가 극단으로 간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그 반대편 극단에 고착된 것도 문제다. 균형의 중심을 잡는 일을 재량이 아닌 제도가 보장해야 한다.
둘째, 임기를 늘려야 한다. 현행 1년에서 최소 2~3년으로 연장하고, 임기 내 실질적 성과 평가와 연계하는 구조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일본 CSTI처럼 국회 동의를 거치는 방식으로 위상을 높이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 과학기술 정책 관계자는 "위원직이 명예직이 아니라 책임직이 돼야 현장의 바쁜 사람들이 시간을 낸다"고 강조했다.
셋째, 자문 결과를 완전히 공개해야 한다. 무엇을 권고했고, 그 권고가 어떤 정책에 어떻게 반영됐는지까지. 회의를 실시간 공개한 것은 진전이다. 그러나 권고의 이행 여부까지 공개돼야 자문이 실질을 갖는다. 미국 PCAST는 보고서를 전문 공개하고 행정부의 수용 여부도 공개한다. 공개되지 않는 자문은 책임이 없고, 책임이 없는 자문은 실질이 없다. 심의·의결 이후 R&D를 수행하는 모든 부처를 포괄하는 실질적 연계도 시행령 수준에서 제도화돼야 한다.
세계는 급변하는 과학기술 전쟁 시대에 전략을 세우고 대응에 나섰다. 중국은 당이 방향타를 직접 잡았다. 미국은 시장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설계자 자리에 앉혔다. 일본은 학계와 산업계를 같은 무게로 배치하고 그 결과를 예산에 연결했다. 세 나라의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된 인식은 하나다. 이 시대의 기술 전쟁은 자문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방향을 알고 있다. 과기자문회의를 공개한 것은 시작이다.
과학계 한 원로는 "자문기구 위원은 개인이 아닌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고 액션이 가능한 실질적인 자문의제와 결과 도출에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면서 "과기자문회의는 심의 의결 후 후속 결과의 확인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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