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문화계 잇단 인사 참사에 흉흉
어·청 극단장에 비전문가 임명
현장 예술가가 불신하는 수장
반복된 정치적 나눠주기 인사
지원하되 간섭 않는 룰 버렸나
K컬처 외치며 전문·자율 외면
잇단 예술단체 인사 파행에 대한 문화계 내부 분위기를 묻자 한 예술인은 짧게 답했다. “흉흉하다”. 실망과 배신감을 토로하며 “더는 기대하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이상적으로 능력·평판·경력을 두루 갖추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그중 한둘쯤은 지니기를 바라는 것이 현장의 기대다. 그런데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 초대 단장 겸 예술감독 임명이 또다시 최소한의 바람조차 저버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11일 어연선 전 광명문화재단 대표를 임명하자 어린이·청소년 공연계가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다. 예술인 332명(개인 200명, 단체 132곳)은 성명을 내고 선임 철회와 전문성 검증 기준 공개, 공정한 재선임을 요구했다. 전문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해당 분야의 사실상 전부가 고개를 돌렸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요즘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어느 장관 후보자에 비하면 대중의 관심에서 비켜난 작은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다. ‘그런 자리까지’라는 개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린이·청소년극은 성인극보다 까다롭고 전문적이다. 영아부터 장애 어린이까지 발달 단계와 감각을 헤아려야 하고, 연극은 물론 무용·인형극·음악·서커스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 실험적이다. 화려하게 조명받지 못한 만큼, 현장 예술가들이 오랜 세월 애정과 헌신으로 한 땀 한 땀 키워낸 곳이다.
게다가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은 공적 지원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들인 숙원 사업이다. 2011년 국립극단 산하 연구소로 출발해 15년간 연구와 창작, 작품 개발 끝에 드디어 지난해 독립 법인이 됐다. 하지만 단장 선임이 미뤄지다 뜻밖의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 어린이·청소년 연극이 걸어온 이 정성스러운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런 인사를 할 수 없다.
물론 전문적인 예술 경영자가 맡을 수도 있다. 문체부도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팀장 등을 거친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마당극으로 시작해 ‘현장’의 대표를 지낸 신임 예술감독은 2012년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캠프 출신 인사가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된 뒤, 팀장으로 기용됐을 때 이미 낙하산 논란을 빚었다. 14년이 흐른 뒤 전혀 발을 들인 적 없는 어린이청소년극단을 맡게 됐으니 정부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미 정부는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씨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에, 개그맨 출신 서승만 씨를 정동극장 대표이사에 임명하는 등 인사 논란을 빚어왔다. 4월엔 공연예술인 748명이 연대 성명을 발표하고, 진보 계열 문화연대는 “이재명 정부 문화예술 인사정책을 규탄한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6월엔 국립발레단 단원들이 캠프 출신 인사가 단장으로 거론되자 입장문을 냈다. 이런 가운데 또 무리한 인사로 집단 항의를 불렀다. 비판에 귀를 닫은 모양새다.
예술단체의 수장은 미학적 안목, 장르 고유의 맥락에 대한 이해, 그리고 현장의 신뢰를 갖춰야 한다. 이 가운데 신뢰야말로 제일 앞선 조건이다. 배우와 연출, 스태프와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야 하기에 현장 전체가 등을 돌린 예술감독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가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태에 블랙리스트라는 악몽과 상처가 겹쳐 떠오른다. 그 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이 문화행정의 공식 룰이 됐다. 하지만 블랙리스트가 정부에 비판적인 예술가, 즉 맘에 안 드는 예술인을 ‘배제’함으로써 이 원칙을 짓밟았다면, 지금은 내 맘에 드는 비전문가를 ‘기용’함으로써 이 원칙을 거스르고 있다.
세계가 열광하는 K컬처는 현장 예술가와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K컬처를 국정의 목표로 내걸고, 성과를 자랑하면서 정작 문화의 자율성과 전문성에 무감각하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닫을 수 있나. 문화예술 분야 직책을 ‘아무나 나눠 먹는 자리’쯤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문체부는 어린이·청소년 공연계가 요구한 임명 철회와 검증 기준 공개, 재선임 절차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 공개 공모와 독립 심사, 이의제기 절차를 제도화하고 제대로 지켜야 한다. 문화적이지 않은 인사로 문화의 토대를 갉아먹은 뒤에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최현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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