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의 반도체 장비 계열사 한화세미텍의 HBM 장비 수주 기대감 뒤에 숨겨진 재무 리스크를 집중 점검한다.
한화세미텍 2세대 하이브리드본더 'SHB2 Nano' /사진제공=한화세미텍
한화세미텍(옛 한화정밀기계)이 SK하이닉스의 HBM 공급망 진입이라는 전략적 성과 뒤에서 '회계적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위태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97억원 규모의 TC 본더(열압착 본딩 장비) 첫 수주 공시로 시장의 기대를 모았지만 실제로는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916억원에 달하는 '이연법인세자산'을 설정해 간신히 자본잠식을 면하고 있다.
이 자산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향후 한화세미텍이 짊어져야 할 '4000억원대 누적 이익'이라는 숙제는 HBM 시장 낙관론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916억' 이연법인세자산, 재무 건전성 지키는 마지막 보루
6일 한화세미텍의 2025회계연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한화세미텍은 지난해 이연법인세자산으로 915억9719만 원을 계상했다.
이연법인세자산은 향후 흑자가 났을 때 낼 세금을 미리 깎아주는 '절세 혜택'이다. 과거의 적자(이월결손금) 등을 장부에 자산으로 잡아뒀다가 미래에 이익이 발생하면 그만큼 법인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하지만 이 자산은 양날의 검이다. 회계상 자산으로 인정받으려면 미래에 이 혜택을 다 누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이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야 한다는 엄격한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화세미텍은 이 자산이 없었다면 재무적으로 타격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기준 자본총계는 2429억5786만원이었는데 이중 916억원의 이연법인세자산이 자산에서 제외됐다면 자본총계는 약 1500억원대로 급감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158.43%였던 부채비율이 250%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치솟는다. 통상 부채비율 50~80%대를 유지하는 우량 반도체 장비 업계 평균의 3배를 웃도는 수치다. 이 정도 부실은 금융권의 신규 차입에서 제한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수주에 필수인 이행보증보험 가입이 막힐 수 있는 등 정상적인 영업 활동에 치명적인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위험 수위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라는 대형 고객사 유치를 시작으로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재무 조건이 선행돼야하는 상황"이라며 "대규모 이연법인세자산이 절실했던 이유"라고 해석했다.
HBM 장밋빛 전망 쏟아지지만…'3800억' 벌어야 증명되는 자산 가치
문제는 이 916억원의 자산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얼마의 이익을 벌어들여야 하는 지다. 법인세율을 역산해보면 한화세미텍은 향후 수년 내에 약 3800억원 규모의 누적 과세소득을 창출해야 이 혜택을 모두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한화세미텍은 지난해 이연법인세자산을 전년도인 지난 2024년 대비 약 45% 늘려잡으며 미래에 벌어들여야 하는 수익 규모를 더 키웠다. 2024년 629억4398만원에서 1년 만에 무려 286억원을 더 자산으로 잡으며 향후 한화세미텍이 벌어들여야 하는 수익이 최대 1400억원 늘었다.
이 같은 행보는 한화세미텍이 그만큼 앞으로 사업 성과를 장밋빛으로 예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HBM이 AI 메모리 시장의 핵심 성장동력으로 떠오르며 공급을 늘리기 위한 고객사들의 장비 주문 또한 이어질 것이란 전제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시장에선 HBM을 비롯한 AI 메모리 산업에 대해 긍정적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테크인사이츠에 따르면 핵심 공정 장비인 TC 본더 시장은 2026년부터 본격적인 반등을 시작해 2030년까지 연평균 약 13%의 강한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이후 AI 반도체 시장의 확대로 HBM 수요가 대폭 증가할 예정인 만큼 적층 공정의 정밀도를 결정짓는 TC 본더와 차세대 기술인 하이브리드 본더에 대한 발주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구나 한화세미텍이 한미반도체에 이어 SK하이닉스의 제2 공급사로 부상하면서 장부상 가정한 '미래 수익'이 현실화될 가능성에 힘이 실렸다. 지난해 테스트 과정을 거쳐 올 초 SK하이닉스로부터 약 97억 원 규모의 HBM 제조용 TC 본더 장비 수주를 따내며 이미 한차례 양사 간 협력에 물꼬를 텄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 공급 계약을 마지막으로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에 얼마 규모의 수주를 진행하는 지는 알 수 없게 됐지만 6세대 HBM인 HBM4 전환 국면에서 양사 간 파트너쉽은 더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수주랠리에 따라 실질적으로 현금 흐름이 개선돼야 한다. 한화세미텍은 지난해에도 영업활동현금흐름 -175억 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마이너스를 지속했다. 지난 2024년 241억원였던 장기매입채무(외상값)를 지난해 700억원으로 폭증시키며 지출을 미루는 방식으로 현금 유출을 막고 있는 실정이다.
한미반도체와 '특허 분쟁', 장밋빛 전망 흔드는 시한폭탄
하지만 한화세미텍이 그린 '3800억 원의 미래 수익' 시나리오 앞에는 한미반도체와의 특허 소송이라는 거대한 암초가 놓여 있다. 현재 양사는 HBM 핵심 장비인 TC 본더의 기술 권리를 두고 날 선 법정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만약 소송 결과가 한화세미텍에 불리하게 작용할 경우 단순히 패소에 따른 손해배상금 지불을 넘어 장비 판매 금지나 로열티 지급 등의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한화세미텍이 장부상 계상한 미래 이익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변수다.
회계상 이연법인세자산은 '수익 발생 가능성'이 높을 때만 자산으로 인정받는다. 특허 침해 판결로 인해 주력 제품의 판로가 막히거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된다면 916억원에 달하는 자산은 일시에 '손상차손'으로 처리돼 증발할 위험이 크다. 자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 자산이 사라지면 한화세미텍은 곧바로 심각한 자본잠식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이는 SK하이닉스와의 공급 계약을 유지하는 데나 추가 수주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한화세미텍이 장부에 새겨넣은 916억원의 자산은 결국 미래의 압도적인 성공을 전제로 한 외상표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향후 실질적인 이익 지표가 기대치를 밑돌거나 한미반도체와의 특허 소송 등 대외 변수로 실적 개선이 지연될 경우 이 자산은 일시에 감액 처리되어 재무구조를 무너뜨리는 '부메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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