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투는 나의 힘
남 시선·욕망 좇으면 일상 엉망·파멸까지
비교는 열등감·시기심 심고 심리적 탈진만
내면과 대화 불편한 감정 이름 붙이기 중요
죽음 인지·명상 때 소유·집착서 해방 가능
/일러스트 서동진 기자 sdj1976@idomin.com
무더위에 모두 지쳤는지 상담실도 한가하다. 벌써 8월의 막바지, 올해 절반도 훌쩍 지나갔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금방 할머니가 되겠지. 도대체 뭘 하고 살았담? 후회와 한심함이 몰려든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만 달렸다. 다리는 아프고 손에 쥔 것도 없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조차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은 끝없이 가라앉는다.
사람들은 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오늘 상담실을 찾은 형도 씨도 헛헛하게 배가 고픈가 보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름 괜찮은 삶일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 마음은 늘 구멍이 나 있는 것 같아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힘껏 달려온 것 같은데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동병상련일까. 그의 상실감이 나를 위로하며 쓰다듬는다. 위로의 상담료 대신 내담자에게 맛있는 가을무 차를 대접한다. 말없이 차를 마시며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다.
형도 씨의 허전함이 깊어 보인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남들이 가진 만큼 가져야 하고,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하는 사회. 비교와 경쟁이 문화가 된 사회 분위기에서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남들의 시선과 욕망에 맞춰 허겁지겁 고군분투해온 그의 삶이 안쓰러워 꼭 안아주고 싶다.
형도 씨는 늘 형과 비교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일류 대학을 나와 소위 잘나가는 회사에 취직하고, 아내 또한 남들에게 빠지지 않는 미모에 주식 투자까지 잘해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어주는 형. 그에 비해 공부도 그저 그렇고, 직장도 그저 그렇고, 애인은 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은 늘 집안의 꼴통 취급을 받는단다. 게다가 같은 학교 출신의 동료는 자신보다 진급도 빠르고 뭐든 잘하는 능력자여서 늘 질투심에 괴롭단다. 그렇게 질투하는 자신을 사람들이 구질구질하게 여길까 봐 또 전전긍긍한다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스피노자가 언급한 인간의 48가지 감정 중에 질투심처럼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도 없을 것이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두 작품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질투심의 파괴력을 그리고 있다. <오셀로>에는 명대사가 나온다. “오, 주인이시여, 질투를 조심하시옵소서. 질투는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며 먹이로 삼는 녹색 눈의 괴물이니까요.” 우리를 잡아먹으려 성큼성큼 다가오는 녹색 눈의 괴물이라니.
질투는 어떤 상황에서 생기는 것일까? 질투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명예나 사람, 사랑이나 물질 등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거나 혹은 빼앗길 것 같은 불안에서 비롯된다. 질투심에 불타본 적 있다면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 주범인지 이해할 것이다. 질투가 타인이 가진 것에 느끼는 시기심의 감정이라면, 열등감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을 미워하고 비하하게 만든다. 더 암울한 것은 질투와 시기의 감정은 나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나 공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일터나 가족, 친구 등 동일 범주 안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존재가 대상이 되기에 더 괴롭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처럼 우리 사회는 유독 질투와 시기심을 유발한다. 비교와 경쟁이 지나친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 혼자 살아내기도 급급한데 남까지 질투하며 살아가자니 죽을 맛이다. 상담실을 찾아온 형도 씨 또한 열등감과 질투심에 시달려 지쳐 있다. 질투는 누구나 느끼는 정상적인 감정이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끌어안을 수도 없다. 질투심은 착한 사람이 느껴서는 안 되는 나쁜 감정이기 때문이다. 느껴서는 안 되는 질투심이 강렬히 발동하면 가까운 사람의 성공이 마치 내 삶의 실패로 느껴지기도 한다. 인지 작용이 왜곡되는 것이다. 또는 질투심을 억누르면서 완벽주의에 빠지거나 권위로서 상대를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예도 있다.
수시로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질투, 녹색 눈의 집요한 괴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첫째, 질투심이 일어나는 내 마음을 지켜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질투에 사로잡혀 있구나. 힘들겠다. 그래, 무엇이 그렇게 질투하게 만드는지 말해보렴’. 스스로 내면과 대화하며 비난 없이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다. 심리학자 칼 융도 <레드북>에서 자기 내면(심혼)과 기탄없이 대화하는 장면을 통해 분열된 마음이 통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담사는 형도 씨에게도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했다. 그는 질투의 감정을 통해 능력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알게 되었다. 유능한 동료를 운 좋고 재수 좋은 사람으로 비하한 것은 바로 자신의 열등감임을, 그러니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기로 약속했다. 동기부여가 된 그에게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둘째, 감정을 언어화하는 것.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나의 질투심, 나의 연민, 나의 시기심, 나의 열등감 등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주고 인정하게 되면 우리 뇌의 편도체는 훨씬 편안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한다. 불편한 감정이더라도 어린왕자처럼 나의 장미라고 불러주는 것이다. 감정은 스프링과 같아서 누르면 튀어오르려는 반작용이 엄청난 힘으로 작용한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가중하고 몸과 마음을 소진시킬 뿐, 그러니 감정을 잘 돌볼 수 있기를.
‘차이’에 주목한 철학자 질 들뢰즈는 자본주의 속성을 경쟁과 비교로 파악하면서 경쟁이라는 문화 코드가 질투심을 일으킨다고 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바람직한 모델로 제공하는 타인의 욕망하는 삶을 따라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달려간다. 형도 씨도 남들처럼 열심히 삶을 살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심리적인 소진과 탈진뿐.
살아가는 과정은 자신과의 투쟁이다. 타인이나 동료와의 싸움이 아니다. 타인의 삶을 흘깃거리지 않고 자신의 삶에 오롯이 집중할 때 질투심과 시기심은 사라진다. 삶이란 자신과의 온전한 동행임을 잊지 않을 때 동료와의 관계도 배움과 동행의 관계로 변화시킬 수 있다.
최근 들어 여러 철학자들이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다양성 또는 다중성)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개념의 철학적 의미는 세상을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나 고정된 본질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수많은 차이의 집합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개념이다.
우리 얼굴이 모두 다르듯 서로가 차이의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인간관계를 통해 주름을 형성하고 늘려가는 수용적인 삶은 아름답다.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 입거나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사람과의 수많은 갈등과 접촉은 깊은 주름을 만든다. 깊이 접힌 주름이 있어 마음은 오히려 유연하게 작동할 수 있다. 질 들뢰즈의 어록에는 멋진 말이 있다. “타인의 꿈을 믿지 마세요. 타인의 꿈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는 끝장입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페르소나(사회적인 얼굴)를 요구하고 타인의 꿈을 강요하지만, 그것이 허상이라면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질투와 시기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나의 방식을 제안하고 싶다.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늘 인식하며 살아가는 자세이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우주는 수많은 죽음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죽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 형도 씨도 알고 나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타인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흠집을 낸다. 타인에게만 상처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고 상처 내며 살아간다. 그러나 일상에서 죽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명상할 때 우리는 소유와 집착, 질투심 등 한낱 부질없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
서른 살에 유고 시집을 남긴 시인 기형도는 일찍이 이런 삶의 진리를 터득했던 것일까.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우리 모두 시인 기형도처럼 ‘질투의 힘’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남의 차를 부러워하고 남의 아파트를 부러워하고,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의 능력을 끊임없이 부러워한다. ‘아이 엔비 유(I envy you) 아이 엔비 유, 나는 네가 부러워 부러워’를 종달새처럼 조잘대며 그렇게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말처럼 사랑을 찾아 헤매면서 정작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에는 서툴고 인색한 사람들. 이 세상 소풍이 끝날 때 후회와 자책으로 아이처럼 엉엉 울면 이를 어쩌나.
/이은혜 이은심리상담센터 소장
☞필자 소개
상담을 업으로 밥을 먹습니다. 인문학 공간 이은문화살롱을 운영하며 밥을 까먹지만, 마담 역할이 좋아 종종 즐거운 사람이지요.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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