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과 사람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법
조선규의 문제 핵심. 조선규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한국 금융은 여전히 사람과 기업의 미래 대신 과거의 담보를 본다. 국내 사업체 거의 전부와 고용의 대부분을 떠받치는 중소기업이 제도권 금융에서는 가장 뒤에 선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대기업에는 실적과 브랜드, 시장 지위가 곧 신용으로 작동하지만, 중소기업에는 땅과 건물부터 요구한다. 국책은행까지 현장에서는 주택담보대출 실적에 매달린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관행은 기업의 선택을 왜곡한다. 장사가 잘돼도 설비와 인력에 투자하기보다 대출받기 좋은 부동산을 먼저 찾아 나선다. 자금을 늘리려면 부동산을 사고, 그 부동산을 지키느라 또 돈이 묶인다. 한국은행 통계에서 가계·기업을 합친 부동산 담보 대출 비율이 주요국보다 높게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본이 생산과 혁신보다 부동산에 고여 있다는 얘기다.
해법은 신용평가 방식을 바꾸는 데 있다. 재무제표는 과거의 성적표일 뿐 경영자의 역량과 기업의 생존력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디지털 거래 기록, 납부 이력, 생활 패턴은 기존 신용정보로는 잡히지 않는 면을 드러낸다. 해외에서는 이런 정보를 활용한 신용 모델이 이미 작동 중이다. 은행 계좌가 없던 이들이 모바일 데이터만으로 소액 대출을 받아 장사를 시작하고, 새로운 신용 점수 체계가 기존 모델을 보완한다. 인도에서는 한국 핀테크가 이런 방식으로 금융 이력이 약한 고객에게 대출을 공급하며 실적을 쌓았다. 기술은 검증됐다. 남은 건 의지와 규제 설계다.
인터넷전문은행 출범 당시 한국도 비슷한 기대를 품었다. 기존 은행이 꺼리는 중금리·중신용, 소규모 사업자 영역을 IT 기술로 풀어 달라는 요구였다. 지금 이 은행들의 대출 포트폴리오를 보면, 기대와 현실의 차이가 선명하다. 주택담보대출 비중은 빠르게 늘었고, 중신용·중소기업 대출 확대는 뒤로 밀렸다. 진입 허가를 내준 금융당국은 구체적인 의무를 인가 조건으로 못 박지 못했다. 중소기업 대출 비율, 독자 신용모델 구축, 대안 데이터 활용 같은 과제는 선언에 그쳤다.
지금이라도 방향을 되돌릴 수 있다. 인터넷전문은행과 정책금융기관에 중신용자·중소기업 대출 비중에 대한 최소 기준을 부과하고, 인가 유지 심사에서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 비전통 데이터를 활용한 신용평가 모델 개발과 적용을 의무화하고, 그 결과를 정기적으로 공개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개별 은행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교한 중소기업 신용평가 인프라는 공적 플랫폼으로 구축해 함께 쓰게 해야 한다.
담보는 이미 쌓아둔 것을 확인한다. 신용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가늠한다. 한국 금융이 전자만 붙들고 있으면 자본은 계속 부동산에 머문다. 데이터라는 도구를 이용해 사람과 기업의 잠재력을 더 세밀하게 읽어내기 시작할 때, 자본은 생산과 혁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칼럼이 말하고자 했던 “담보의 웅덩이에서 신용의 강물로”라는 표현은 그때 비로소 현실을 가리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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