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
후불제 R&D 첫해 4개, 이미 성과 나오고 있어
AI에 맞는 기계 만드는 'K-Machine' 전략 등
창립 반세기, "50년의 기계, 다음 50년의 지능"
"출연연 신뢰 높이고 산업현장과 거리 좁히고"
기업 출신인 류석현 원장은 연구 성과가 보고서로 남는게 아니라 현장 적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계연은 이를 위해 '후불제R&D'제도를 도입했다. 출연연이 개발한 기술을 기업이 만족할때 이전해 가는 제도이다.[사진= 한국기게연구원]
"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에 적용되는 결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은 인터뷰 내내 '현장'이라는 단어를 놓지 않았다. 두산중공업 부사장과 기술연구원장을 거치며 GE·지멘스·미쓰비시 등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던 경험이 몸에 배어 있는 까닭이다. 2023년 12월 기계연 원장 취임 이후 그가 밀어붙인 변화들도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오는 14일, 한국기계연구원이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1976년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로 첫발을 내디딘 이래 대한민국 산업화의 등뼈를 받쳐온 기관이 반세기를 맞이하는 자리다.
류 원장은 스스로를 "지난 50년을 마무리하는 원장인 동시에 새로운 50년을 출발하는 원장"이라고 정의했다. 민간기업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제19대 원장에 오른 그는 취임 직후부터 "기계연이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초석을 놓겠다"는 포부를 공언해 왔다.
기계연 50주년을 앞두고 류석현 원장을 만났다. 최근 방문한 기계연은 50주년과 기계주간 행사를 앞두고 내부 곳곳이 손님 맞이 준비로 분주했다.
◇ 산업 현장의 문제 풀릴때까지 후불제 R&D
올해 3월 류 원장은 한국공학한림원 일진상을 받았다. 수상 공로는 '산학연 연계 기여'. 그 중심에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산학협력처장으로 외국인 유학생과 한국 기업을 연결해 채용을 지원하는 U-LINK 플랫폼 구축, 기계연에서 도입한 '후불제 R&D'가 있다.
보통 정부 R&D는 선불 구조다. 기업이 개발비를 먼저 부담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도 비용은 이미 지불됐고, 기업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다. 기업과 출연연 사이가 멀어지는 구조적 원인 중 하나였다.
류 원장은 이 구조를 뒤집었다. 기업이 원하는 기술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면, 기계연이 자체 자금으로 먼저 개발에 나선다. 기업이 결과에 만족할 때 비로소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기업 리스크를 줄여준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의 진짜 요구를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R&D 실패의 본질을 ‘기술력 부족’이 아닌 ‘요구 조건의 불명확성’으로 진단한다. 대기업은 핵심 조건을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 결국 연구자는 추정으로 R&D를 진행하고 결과는 엇갈린다. 이 간극이 반복되며 실패가 누적되고 기업과 출연연간 신뢰도 흔들린 것이다.
후불제 R&D는 이 구조적 불신을 허무는 실험이다. 협약을 맺고 기업이 원하는 성공 조건을 명확히 정의한 뒤 기계연이 먼저 개발에 착수한다. TRL(기술성숙도) 80% 이상의 기술을 보유한 과제에 한해 적용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2024년 시작된 후불제 R&D는 첫해 4개 과제를 수행했다. 이미 성과도 나오고 있다. 한 대기업과의 협력에서는 투입 개발비의 두 배 이상을 기술료로 회수하기도 했다.
아직은 정부 지원 없이 자체 적립금으로 운영되지만, 류 원장은 이를 "기술료 재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본다.
기계연은 중소·중견기업 지원도 확대하고 있다. 류 원장은 "중소기업은 기술 수요는 있는데 자체 해결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기술이 현장에서 활용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 그게 출연연이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류석현 원장은 올해 공학한림원에서 일진상을 받았다. 산학연 연계에 기여한 부분을 인정받았다.[사진= 한국기계연구원]
◇ 기계에 AI를 입히려다, AI에 맞는 기계를 만들기로
취임 직후 류 원장이 내건 화두는 AX(AI 전환)와 DX(디지털 전환)였다. 2023년 말 내부 반응은 냉담했다. 기계 연구와 AI는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는 밀어붙였다. 연구자 AI 교육을 내부 평가 항목에 포함시키고, 2000만 원 규모의 소규모 AI 과제를 공모해 적립금으로 배분했다. GPU 등 인프라 투자도 앞서 집행했다. 나아가 AX·DX 지표를 자체 개발하고 '2030 디지털 KIMM' 달성을 정량적 목표로 설정했다. AX 전략을 전담하는 'AX Labs'와 DX를 총괄하는 'DX 전략연구단'이라는 신설 조직도 만들었다.
그러던 중 전략을 한번 더 진화시킨다.
“처음에는 기계에 AI를 붙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AI에 최적화된 기계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계기술에 인공지능과 디지털을 결합한 'K-Machine' 개념이 그 결과물이다. 류 원장은 이를 "KIMM이 경쟁력을 가진 전통적 기계기술에 인공지능·디지털 기반 기술과 서비스 개념을 결합해, 대한민국의 기계·장비 산업 생태계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 것"으로 정의한다.
디지털 트윈은 그 핵심 축이다. 기계연은 2차전지 전극 공정의 디지털 트윈을 개발해 미국 디지털 트윈 컨소시엄(DTC)에 유저 케이스로 등록했다. 단순 기술이 아닌 실제 산업 적용 사례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 기술은 이미 공장 구축을 앞둔 기업에 이전돼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기계연은 이를 공작기계, 건설기계, 국방 분야로 확장하며 ‘가상공학 플랫폼-기계 데이터 플랫폼-디지털 트윈’의 3축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 "휴머노이드 실기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몸을 갖는 것, 그게 AI 휴머노이드입니다. 지금 모든 것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어요." 류 원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기계연은 국내 최초로 6축 다관절 산업용 로봇을 개발한 기관이다. 소재·부품·장비부터 설계·공정·완성 플랫폼까지 로봇 분야의 '풀스택'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휴머노이드 분야에서 미국·중국에 뒤처진 것은 사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다들 반대했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없다고요. 하지만 LLM이 결합되면서 판이 바뀌었습니다. 이미 상용화의 임계점을 넘었다는 평가가 많아요. 돈이 될지 안 될지를 따지는 건 이제 무의미하고, 공급망을 구축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기계연은 현재 약 300평 규모의 데이터 팩토리를 설계 중이다. 가사노동·간병·건설 현장 등 다양한 환경에서 로봇에게 작업을 학습시킬 대규모 데이터를 수집하는 시설이다. 우선 20대를 투입하고 궁극적으로 100대 운용을 목표로 한다. AI 학습용 소프트웨어 인프라는 ETRI가, 데이터 생산 거점은 기계연이 맡는 역할 분담도 논의 중이다. 기계연의 대표 브랜드로 선정된 '카이로스(KAIROS)'가 바로 이 K-AI 휴머노이드 로봇 플랫폼이다.
◇ "출연연은 공기 같은 존재, 위기 때 그 가치 보인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출연연의 역할을 묻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반문했다. 류 원장은 "지금 이 순간 모든 출연연이 사라진다고 가정해 보자. 대한민국이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소부장 사태를 극복하고, 중동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출연연에 수십 년간 축적된 지식 자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 교수의 지식은 그분이 은퇴하면 흩어지고, 기업의 지식은 영리 목적에 종속된다"면서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집적되는 곳, 그게 출연연이다. 공기 같아서 평상시엔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 현장 분위기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여기 연구원들은 깨어 있는 순간 연구 생각을 합니다. 처우가 민간 대기업보다 약해도 국가와 미래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민간 기업에 있으면 처우는 좋겠지만 오너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고, 출연연에 오면 국가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것, 그 차이를 연구원들은 알고 있습니다."
PBS(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 단계적 폐지에 대해서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였다.
"경쟁이 가져온 긍정적 동력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건비를 위해 다소 맞지 않는 과제를 수행하는 부작용도 있었어요. 앞으로는 임무 중심·대형·융합 과제 방향과 맞물려 개선될 거라 봅니다."
다만 그는 "대형 과제 위주로 가면 시니어 박사들이 주로 책임자가 되고 신진 연구자들이 커리어를 쌓기 어려워진다"며 "씨앗을 뿌리는 단계의 연구는 계속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재 육성을 위한 '3R 전략'도 가동 중이다. 우수 인재 유치(Recruiting)·성장 환경 조성(Retention)·역량 강화(Reskilling)의 세 축으로 구성된 이 전략은 기계연 BEST 경영전략의 마지막 'T(인재경영)'를 구체화한 것이다. "연구원이 성장하고 기관이 존중받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 사람을 남기는 50주년
50주년을 맞아 류 원장이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성과나 기술에 앞서 사람이다.
"80년대 초 6축 다관절 로봇을 누가 만들었는지, 지금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그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것, 그게 50주년의 핵심입니다."
기계연이 자체 운영 중인 'FBO(First·Best·Only)' 프로그램은 세계 최초·최고·유일의 성과를 낸 숨은 연구자를 발굴해 인증하고, 멘토와 심의위원으로 활용하는 제도다. 지난 50년 역사에서 11개 분야 20명의 FBO를 선정했고, 미래 FBO 육성을 위한 과제도 신설했다. 2026년부터는 선정 과제에 10억 원 이상을 지원할 예정이다.
"과거의 전설적인 선배를 선양함으로써 지금 세대 연구자들이 동기부여를 받고, 미래의 FBO를 육성하기 위한 R&D 과제와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것,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야 합니다."
'KIMM-NEXT 50'은 '지능형 기계 문명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슬로건으로, 5대 도전목표와 5대 대표 브랜드를 포함한다. 카이로스(K-AI 휴머노이드)·마눅스(첨단제조장비)·케이히트업(K-Heat Pump)·에어파이브(공기청정기술)·킴사이버랩(가상공학 플랫폼)으로 구성된 5대 브랜드는 출연연 최초의 '브랜드 경영' 시도다.
"자기부상열차 이후 기억나는 게 없다는 소리를 밖에서 듣습니다.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구현의 징표가 필요하고, 브랜드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임기 말을 향해 달리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기고 싶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그의 답변은 단순했다.
"우리가 하는 연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자부심을 구성원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기계기술이 눈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산업과 사회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연구진의 헌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류 원장은 "AX, DX 등 뿌린 씨앗이 다음으로 이어지며 선순환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국기계연구원은 4월 14일부터 19일까지를 '기계주간'으로 지정하고, 대국민 개방 행사와 첨단기술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50주년 기념 홈페이지
에서 기계연 50년사를 비롯해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기계연구원은 14일 5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사진= 한국기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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