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작가. 뮤지엄 산 제공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검은 기둥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높이 8미터, 무게 7톤. 숯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형물 ‘불로부터(Issu du feu)’는 마치 자연이 남긴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본능적으로 걸음을 늦추게 된다. 단순한 조각 작품 앞에 서 있기보다, 어떤 의식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듯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에서 열리고 있는 이배 개인전 ‘En attendant : 기다리며’는 단순한 작품 감상보다, 하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제공한다. 나무가 숯이 되고, 숯이 다시 불꽃으로 태어나는 시간과 작가가 30여년 간 붙들어온 숯의 시간이 이번 전시에 배어 있다.
이배 작가 뮤지엄 산 개인전 전시 전경. 황인옥기자
이번 전시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공간이다. 뮤지엄 산(SAN)이 강한 존재감을 가진 장소라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다. 푸른 산속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 산은 자연과 건축, 빛과 그림자가 정교하게 결합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다. 많은 작가들이 이 공간 앞에서 압도당한다. 공간 자체가 이미 너무 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서다.
이배 역시 “처음에는 부담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뮤지엄 산을 현대적인 수도원에 비유했다. 실제로 이곳은 관람객에게 무엇을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천천히 걷고 머무르며 생각하게 만든다. 이배는 이러한 공간의 특성을 거스르지 않았다. 공간이 가진 침묵을 더욱 확장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전개했다. 그 결과 전시는 공간 전체를 활용한 하나의 경험으로 완성됐다.
그에게 이번 전시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전시로 규정한 것이다. “40년 가까이 외국에서 떠돌며 작업하다 보니, 내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다시 묻게 됐어요. 이번 전시는 나의 근원으로 돌아가 나 자신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제가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무엇을 꿈꾸며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이번 전시는 근원에 대한 회귀라기보다 저의 본질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뮤지엄 산에 전시된 이배 작가의 작품. 황인옥기자
이배 하면 숯이다. 숯은 그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그가 숯을 만나게 된 계기는 의외로 현실적이었다. 프랑스에서 작업할 시기,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는 값싼 바비큐 숯을 구입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연히 선택한 재료는 곧 그의 예술 세계를 규정하는 운명이 되었다.
작가는 "숯은 처음엔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한 재료였다. 그런데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그 안에 내가 살아온 문화와 기억, 그리고 동양적 정신성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숯은 특별한 물질이다. 나무였지만 불에 의해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어서 생명과 무생물, 생성과 소멸,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상태다. 이 모호한 경계성은 곧 이배 작업의 핵심 개념으로 발전한다. 경제적 이유로 선택한 숯을 반복적으로 숯을 만지고 문지르고 자르고 쌓는 과정 속에서 그는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발견하게 됐다.
죽음 이후에도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언제든 다시 불꽃을 일으킬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숯은 그에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끝나지 않은 상태로 다가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배는 동양적 순환관과 현대미술의 조형언어를 연결하는 통로를 발견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En attendant : 기다리며’ 역시 그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일반적으로 기다림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수동적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배의 기다림은 완성 이전의 시간이며 생성의 과정이다.
“저의 기다림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향해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죠."
이배 작 . 황인옥기자
뮤지엄 산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거대한 숯 조각 ‘불로부터’는 이번 전시의 상징적 출발점이다. 야외 공간에 설치된 이 작품에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산불의 기억이 깊게 스며 있다. 작품은 파괴의 흔적인 동시에 회복을 향한 기도의 형상이다.
"강원도 고성 산불 현장을 직접 봤습니다. 불타버린 숲을 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이 조각은 그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의 마음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청조갤러리1의 순백의 공간에 이르면 전시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진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적 공간을 존중하기 위해 이배는 오히려 개입을 최소화했다. 수만 개의 호치케스 핀으로 완성된 작업은 비어 있음과 채워짐, 물성과 비물성이 만나는 경계를 보여준다.
"안도 선생님이 이미 그림을 그려놓은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건축을 덮기보다 건축과 함께 숨 쉬기를 바랐습니다."
청조갤러리2에 들어서면 검정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배에게 검정은 단순한 색 이상의 의미로 작동한다. “숯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나무에서 왔고 각기 다른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닥에 펼쳐진 숯 드로잉은 하나의 숲과 같다. 소나무와 포도나무, 잣나무의 숯들이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기며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전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비커밍(Becoming)’ 공간은 작가의 개인적 기억과 가장 깊게 맞닿아 있다. 청도의 흙을 가져와 만든 논 설치와 영상 작업은 그의 유년기를 환기한다. 작품은 자연과 인간, 노동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삶의 원형을 보여준다.
"제 아버지는 농부였습니다. 사실 저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하던 기억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뮤지엄 산에 전시된 이배 작가의 작품. 황인옥기자
파리서 오히려 한국적인 것 천착
산불 현장서 '예술의 역할' 고민
예술, 재앙 못 막지만 기억하게 해
프랑스, 독일 등서 개인전 '국제적 명성'
이배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프랑스에서 오히려 한국적인 것에 천착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해외로 나가면 세계적인 언어를 익히려 하지만, 이배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파리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다. 유럽과 미국, 남미와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이 모여 있는 공간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한국 작가라는 정체성을 의식하게 됐다.
그는 종종 프랑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로 겸재 정선을 이야기했지만 많은 서양인들은 그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수묵화가 지닌 정신성과 동양적 자연관이 현대미술 담론 안에서는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숯은 그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숯의 특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동양의 수묵 전통을 연상시키면서도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물질. 작가는 그 숯을 통해 지역성과 보편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30여년 여정은 한국성을 현대미술이라는 보편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이배의 작업의 핵심은 숯 자체보다 숯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세계관에 있다. 그는 30년 넘게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여전히 동양 문화와 한국적 정신성을 어떻게 현대미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숯은 그 질문을 계속하게 만드는 재료”라고 답했다.
이배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뮤지엄 산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이배의 뮤지엄 산 개인전을 관람하며 질문 하나가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였다. “전쟁과 기후위기,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예술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이배의 답은 명확하지 않다.
그는 대신 자신의 태도를 보여준다. 무력함을 느꼈던 산불현장에서조차 그는 예술의 역할을 생각했다. “예술이 재앙을 막을 수는 없지만 기억하게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이 당시 그의 인식이었다. 그의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 멈춰 서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역할로 연결돼 있다.
이배 작가는 결국 숯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업은 출품과 함께 팔려나간다. 국내에서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3년 한국미술비평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했다.
개인전 이력도 국제적이다. 2015년에는 유럽 최대의 동양예술품 박물관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 독일 에스더 쉬퍼 갤러리 전속 합류 등을 통한 국제적 위상도 더욱 공고해졌다.
뮤지엄 산 이배 개인전은 12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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