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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선·방산·조선, 이제 단품 아니다… K-기업 '국가 운영 패키지' 수출...

같은 날 수출입은행은 AI 기반 신용평가 시스템 전면 개편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따로 보면 개별 기업의... 국회미래연구원이 이날 내놓은 보고서는 한국의 AI 투자가 반도체·GPU 등 하드웨어 계층에 과도하게 집중돼...

전선·방산·조선, 이제 단품 아니다… K-기업 '국가 운영 패키지' 수출...

-대한전선 전력망·LIG 해양 전투체계·HD현대 조선 OS 판다

-수은 AI 신용평가 개편, 자본 조달 문법까지 바꾸기 시작해

마드리드에서 대한전선은 해저케이블을 앞세워 유럽 풍력 시장 공략에 나섰다. [사진=대한전선]

전선·방산·조선은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산업이다. 전선은 전력망의 영역이고, 방산은 군수의 영역이며, 조선은 제조업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21일 내놓은 네 개의 장면을 한데 놓고 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드러난다. 마드리드에서 대한전선은 해저케이블을 앞세워 유럽 풍력 시장 공략에 나섰고, 미국 메릴랜드에서 LIG 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는 비궁과 자폭용 무인수상정을 전면에 세워 미국 해양 방산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뉴델리에서는 HD현대가 인도 중앙정부와 손잡고 합작 조선소 사업을 사업화 단계로 끌어올렸다. 같은 날 수출입은행은 AI 기반 신용평가 시스템 전면 개편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따로 보면 개별 기업의 발표에 그치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 보면 분명한 흐름이 읽힌다. 한국 산업이 이제 단순한 ‘제품 수출’을 넘어 설계·생산·운영·금융을 함께 묶는 ‘체계 수출’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대한전선이 이번 전시에서 내세운 525kV급 HVDC 해저케이블의 실체는 단순한 전선을 넘어선다. 대한전선이 겨냥하는 것은 설계와 생산, 포설선, 시공법인, 유지보수까지 이어지는 전체 체계다. CLV 포설선 ‘팔로스’와 시공법인 ‘대한오션웍스’를 함께 전면에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 해상풍력 시장은 더 이상 ‘케이블을 잘 만드는 회사’를 찾지 않는다. 해저 전력망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합해 완성할 수 있는 사업자를 본다. 결국 기자재 공급자가 아니라 EPC에 가까운 사업자로 올라서야 수익이 난다.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 해저케이블 2공장 역시 단순한 생산능력 확대가 아니다. 유럽의 장기 프로젝트 발주 구조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전략적 포석이다.

미국 메릴랜드에서 LIG 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와 HD현대중공업은 비궁과 자폭용 무인수상정을 전면에 세워 미국 해양 방산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사진=LIG 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

LIG 디펜스&에어로스페이스가 미국에서 보여준 방식도 다르지 않다. 비궁의 100% 명중률은 이미 성능 검증을 마친 기술의 언어일 뿐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그 다음에 있다. 비궁 하나를 파는 것이 아니라 비룡, CIWS-II, 자폭용 무인수상정을 함께 묶어 해양 솔루션 전체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장면은 HD현대중공업과 공동 부스를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무기는 플랫폼을 만나고, 플랫폼은 다시 작전 개념과 결합한다. 미 해군이나 미국 방산 조달기관이 들여다보는 것은 개별 무기체계의 성능표가 아니다. 어떤 무장이 어떤 함정 위에서, 어떤 운용 개념 속에서 통합되어 작동하느냐다. 결국 LIG는 단일 무기 공급자를 넘어 해양 전투체계를 설계하는 기업으로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있다.

HD현대의 인도 합작조선소 사업은 이 변화의 종착점을 보여준다. 조선은 오랫동안 선박을 건조해 인도하는 산업으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이번 협약을 들여다보면 판매 대상은 선박이 아니다. 인도 정부는 초도 물량을 한국 조선소에 발주하고, 자국 인력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게 한다. HD현대는 최대 주주로서 합작 조선소의 운영 전반을 총괄한다. 여기에 블록·엔진 등 국내 기자재 업체들의 현지 진출까지 연계한다. 결국 HD현대가 제공하는 것은 배 한 척이 아니라 조선소의 운영체계, 인력 양성, 공급망 구축, 자동화 기술, 스마트 조선소 모델까지 포함한 통합 패키지다. 조선업이 개별 제품을 넘어서 국가 산업화 모델을 수출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세 장면을 하나로 묶는 마지막 축은 수출입은행이다. 수은의 신용평가시스템 개편을 단순한 전산 고도화로 보면 핵심을 놓친다. 담보보다 신용을, 과거 실적보다 기술력과 성장성을 보겠다는 것, 여기에 투자 전용 모형과 ESG 평가까지 더하겠다는 것은 자본을 고르는 기준 자체를 다시 쓰겠다는 의미다. 수은은 이미 전체 여신의 88.6%를 무담보 신용여신으로 운용하면서도 BIS 자기자본비율 17%대, 고정이하여신 비율 1% 미만을 유지해 왔다. 이 은행이 평가의 문법을 바꾸는 순간, 정책금융의 문을 통과하는 기업의 순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한전선의 해저 전력망, LIG의 해양 전투체계, HD현대의 해외 조선소 같은 장기 프로젝트는 결국 금융이 붙어야 비로소 수출로 완성된다. 제품이 체계로 확장되는 순간, 금융은 더 이상 보조 수단이 아니라 사업의 중심축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볼 대목이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이날 내놓은 보고서는 한국의 AI 투자가 반도체·GPU 등 하드웨어 계층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고, 기반모델과 응용 서비스·플랫폼 등 상위 가치사슬로의 이동은 구조적으로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정부 예산 역시 투입 규모 중심, 부처별 분산 편성 구조에 머물러 성과 관리와 전략적 조정 기능이 약하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하드웨어 중심의 1·2계층 투자에서 벗어나 피지컬 AI, 응용 서비스, 도메인 특화 스타트업 등 3·4계층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분절된 공공 자본의 흐름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날 제시된 네 개의 장면이 바로 그 보고서의 문제의식을 산업 현장에서 선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전선은 단순 제조업체에서 벗어나 운영·시공·유지보수를 아우르는 서비스 사업자로 올라서고 있고, LIG는 개별 유도무기 공급자를 넘어 해양 작전개념과 무인전력을 통합한 체계 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HD현대 역시 조선소 건설에 그치지 않고 인력 양성, 공급망 이전, 디지털 운영 모델까지 포함한 국가 산업 패키지를 수출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여기에 수은은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할 평가 인프라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결국 한국 산업은 AI 보고서가 지적한 ‘상위 가치사슬로의 이동’을 소프트웨어가 아닌 현실 산업의 방식으로 먼저 실행에 옮기고 있는 셈이다. 이번 흐름을 기존의 산업 구분이 아닌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 흐름의 본질은 단순히 “수출 품목이 늘었다”는 데 있지 않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국가가 발주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운영권 경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과거에는 케이블은 전선 업체가, 무기는 방산 업체가, 선박은 조선사가 각각 분리해 판매했다. 지금은 다르다. 누가 더 오랜 기간 프로젝트를 통합해 관리할 수 있는지, 누가 더 많은 밸류체인을 자기 아래로 끌어당길 수 있는지, 나아가 상대국 정부와 산업 전환의 구조까지 함께 설계할 수 있는지가 승부를 가른다. 이 단계로 들어서면 수익성은 높아지지만 그만큼 책임도 커진다. 동시에 수출은 단기 실적을 쌓는 거래가 아니라 외교, 금융, 기술 이전, 현지 고용, 공급망 재편까지 한꺼번에 얽히는 장기 게임으로 성격이 바뀐다.

국회 전경 [사진=최지훈 기자]

대한전선, LIG, HD현대, 수은의 발표는 서로 다른 영역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한국 산업이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서 ‘어떤 질서를 운영할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전선은 전력 질서를, 무기는 해양 질서를, 조선은 산업 질서를 건드린다. 그리고 금융은 그 질서 위에 자본의 우선순위를 매긴다. 지금 나타나는 변화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한국은 더 이상 단순히 제품을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상대국의 인프라와 산업 체계 일부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단계로 올라가려는 흐름에 들어섰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이 들어가고 있는 시장은 단순 납품이 아니라, 상대국의 전력망과 조선소, 해양 전력까지 장기간 묶어 운영하는 구조”라며 “제품 경쟁이 아니라 운영권과 표준을 누가 쥐느냐의 싸움으로 바뀐 만큼, 수주 이후 10년을 내다본 자본·기술·외교가 동시에 움직이지 않으면 경쟁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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