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로 생성한 이미지
그래도 그 칸들을 비워 놓을 수가 없어 ‘약국 운영 보조’라 쓸까 하다,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아내와 이혼 후에 몇 번 회사에 취직한 게 기억이 났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는 곳마다 3주를 못 버티고 자발적으로 나왔으니 이력서에 쓸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딱딱한 사무실 분위기와 답답한 조직 생활을 못 견뎠다. 하다못해 육체를 쓰는 공장에도 취업했으나, 그쪽에선 일주일을 못 버티고 뛰쳐나왔다. 매캐한 연기와 시끄러운 소리는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다행히 아내에게 받은 위자료가 짭짤해서 여태껏 그럭저럭 살 수는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그동안 취미로 했던 소설 쓰기를 떠올려 그 칸에 ‘소설 창작활동’이라고 표기하였다. 지금까지 등단한 적이 없어 약간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자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며칠 전 서평과 만났던 술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가 없던 나는 아침 11시경에 원룸을 나서 시내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에 약간 늦게 도착했다.
카페 안쪽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어제 휴대전화로 내 사진을 그녀에게 보내주어서인지 여자는 금방 날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여자는 젊고 예뻤다. 수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여자는 내게 이력서를 요구했다.
“소설가세요?”
‘헉!’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여자는 웃었다.
“상관없어요. 그 일만 성공하면 되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할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나는 바짝 긴장하여 여자에게 짐짓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저는 이력서에는 없지만 젊은 시절에 그곳에 잠시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곳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해낼 수가 있지요.”
내 말에 여자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주 예쁜 얼굴이었다.
“무슨 죄명이었죠? 설마, 살인이나 폭행은 아닐 테고 혹시 사기? 강간?”
‘이런!’
여자의 발칙한 말에 나는 아무리 그녀가 의뢰자이지만 불쾌했다. 하필이면 그 많은 죄명 중에 사기요, 강간이라니. 나는 여자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되었다.
“학내 민주화를 외치다 잡혀간 겁니다.”
그러자 여자가 내게 농담이었다며 호호, 하며 웃었다. 나는 여자가 내게 주민등록초본을 요구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 내 신원을 조회할 게 뻔했다. 그보다 나는 이 젊은 여자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정말 궁금했다. 내가 몇 번이나 고민하다 이유를 묻자, 여자는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재미있잖아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