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리포트 - 여의도에서 보는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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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3월 정기주총은 우리 기업의 분수령이었다. 2025년 상법 제382조의3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까지 포함되었고, 기업과 경영진, 이사회가 직면한 법적·윤리적 책임의 범위가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사충실의무에 ‘회사 뿐 아니라 주주’가 명시되었고, 이사에게는 “총주주의 이익 보호”와 “전체 주주의 공평 대우”라는 명시적 의무가 부여되었다. 이제 ‘주주가치’는 단순한 구호·권고·평판의 영역에서, 법적 책임과 공시·심사 규율의 영역으로 변화되었다.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주주충실의무가 정착되기 위한 조건으로 △총회에 많은 주주가 참여하게 하여 주총을 소통의 축제로 만드는 것 △제도를 통해 이사회의 결정 과정과 논의 내용을 주주가 알 수 있게 하는 것 △이익 침해 시 이를 신속히 구제할 민사적 절차인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이번 주총이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였는지 여부와 우리에게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번 주총에서 한 행동주의 펀드가 ‘표 대결’만이 아니라 ‘협상과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어낸 점이 주목된다. 전자부품 및 솔루션 전문 기업인 솔루엠과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 간의 포괄적 합의가 대표적이다. 솔루엠은 그동안 상환전환우선주(RCPS) 발행 과정에서 기존 주주의 권익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얼라인은 신주발행무효 소송 등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대응했고, 결국 양측은 이사회 독립성 강화와 자본 구조 개선을 골자로 하는 포괄적 합의에 도달했다.
이 합의의 핵심은 최대주주가 보유한 RCPS 콜옵션 물량의 50%를 핵심 임직원에게 배분하여 사익 편취의 소지를 없애고,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이사가 ‘주주를 위하여’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법리가 실제 기업의 승계 원칙과 보상 체계에 어떻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선도적인 사례다. 이 변화는 이사회가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구체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결과다. 특히 이사회 독립성을 위해 전략 및 유통 전문가를 독립이사로 영입하고, 감사를 2인 체제로 확대하여 내부 견제 기능을 강화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합의에서 우리는 행동주의의 ‘승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주주권 침해로 의심받는 구조를 스스로 고치도록 만드는 동학을 본다. 승소하는 의사결정은 결론이 아니라, 증명 가능한 과정에서 나온다. 투자자 역시 같은 원리를 따라야 한다. ‘분노의 구호’가 아니라 ‘증거의 설계’가 필요한 셈이다. 주주제안과 표 대결 이전에 협상 가능한 의제를 만들고, 회사가 수용 가능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RCPS 구조 조정, 독립이사 과반, 위원회 독립성, 보상·승계 구조의 명료화처럼 ‘주주권 침해 우려’를 ‘구조 개선 패키지’로 번역한 합의형 행동주의는 주주와 회사 모두의 비용을 줄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발 더 나가면, 이 사례는 자본배분(자사주·배당·증자)과 보수가 분리된 안건이 아니라는 점도 명확히 했다. 임원보수 공시에 총주주수익률(TSR)·영업이익을 병기하도록 한 개편을 통해 투자자가 성과와 보수의 연결을 요구할 수 있는 공통 언어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 언어를 활용하면 “보수를 낮춰라”가 아니라 “성과지표·동종업계·주주수익률과의 정합성을 설명하라”는 요구로 논쟁의 수준이 달라진다. 이 장면은 ‘이사충실의무’가 요구하는 바가 결국 감시의무(내부통제)·보수의 정당화(성과연계)·자본배분의 일관성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사회의 의사결정이 회사의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주주가 이사회의 결정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지난 1월8일 삼성전자에서 있었던 사례도 주목된다. 이 회사가 약 2조5천억원 규모 자사주를 매입하는 안건에 대해 독립적 사외이사가 기권하는 사례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단기성과에 치중한다면 행동주의와 주주이익을 중시하는 주주는 자사주 매입에 찬성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경우 사외이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성공을 앞둔 사업의 수익률이 자본비용을 초과하는 것이 보이는 시점에서 투자 대신 자사주 매익소각이 자본비용의 관점에서 바른 것인지 질문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행동주의가 단기적 재무성과 뿐만 아니라 회사의 중장기 발전을 중시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한편, ‘주주충실의무’가 스며드는 속도보다 빠르게 기존 관행으로 저항하는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이들은 규정의 취지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 “형식상 적법”이라는 방패를 들어 실질을 모호하게 만드는 결의를 선택했다. 가장 상징적인 케이스는, 한 재벌그룹 계열 상장사가 횡령·배임 유죄 확정 및 사면 이후 전직 총수를 ‘명예직’으로 복귀시키고 보수를 지급하는 상근 역할로 기획한 사례다. 이사회가 이 안건을 의결했지만 상세 내용이 공시되지 않고 의결되었다. 이사회가 평판 리스크·내부통제 실패의 역사·이해상충을 어떤 절차로 검토했고, 그 검토의 기록을 남겼는지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특히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실형이 확정되었던 지배주주 일가의 복귀와 실적 악화 상황에서의 과도한 보수 인상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되지 않았다. 법원은 판결에서 해당 인사의 행위가 기업 정신과 사회적 가치에 어긋나며, 기업의 재산을 대주주 일가가 사적으로 유용한 점을 엄중히 꾸짖은 바 있다. 만약 이사회가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면, 이는 이사충실의무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이사는 대주주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사에 손실을 끼친 인물을 우대해서는 안 되며,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손실로부터 주주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솔루션 및 소재 산업을 주도하는 ㅎ사의 사례 역시 주주 충실의무 관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해당 기업은 영업손실이 전년 대비 심화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그룹 총수의 연봉을 20% 인상하여 50억원이 넘는 보수를 지급했다. 동시에 회사는 재무 구조 개선을 명목으로 기존 주식 수의 40%가 넘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기습적으로 단행하여 당일 주가가 18% 급락하는 등 주주 가치를 훼손했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가 주주들에게 유상증자를 통한 고통 분담을 요구하기에 앞서, 경영 실패의 책임이 있는 경영진과 총수의 보수를 먼저 조정하는 등의 노력을 보였는지는 의문이다. 보수는 기여와 책임에 비례해야 한다는 경영의 기본 원칙은 주주 충실의무의 핵심이다. 등기 임원이 아닌 ‘미등기 임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주주총회의 보수 승인 감시 체계를 회피하면서 고액 보수를 챙기는 행태는 법 개정 이후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구태로 지목된다.
특히 유상증자로 조달된 자금이 기존 채무 상환으로 사용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증자로 조달된 자본은 회사의 자본비용을 초과하는 사업에 투자되어 회사가치를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 채무 상환에 사용된다는 것은 새로이 조달한 신규자본의 수익률이 기존 비용을 초과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기존 자본사용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상증자 당일 주가가 폭락한 것은 이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금융감독원이 증권신고서에 대해 내린 ‘정정 요구’에 따라 유상증자 규모를 기존 2조4천억원에서 1조8천억원으로 축소하고, 기존 9천억원의 채무상환을 6천억원으로 줄이는 결정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본조달의 비효율성을 개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핵심을 벗어난 해법이다. 감독 당국은 투자자 보호를 명분으로 신고서의 기재 내용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으나, 이는 자칫 기업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형식적 행정 절차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현행 정정 요구 시스템은 기업이 부당한 자본 거래의 ‘논리’를 보강하도록 유도할 뿐, 주주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거래 자체를 차단할 법적 강제력이 부족하다. 기업은 규제 당국의 지적을 반영했다는 명분 뒤에 숨어 ‘형식적 개선’만을 가져온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상법 이사충실의무 개정 이후 첫번째 주총의 상반된 흐름, 즉 그 법 취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순리와 이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 핵심은 우리의 위임을 받은 이사들이 왜 그런 결정을 하였는지를 주주에게 상세히 알리고 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례가 있는지 판단 받는 것이다. 주주에게 의사결정의 사유를 설명하는 것, 이것이 주주총회를 주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축제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주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자본주주의 발전을 이끄는 길인 것이다.
이용우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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