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대구광역시의사회 부회장
영국과 스페인 등 대부분의 OECD 주요 국가에서 전문의를 만나거나 선택적 처치를 받으려면 통상 30일에서 60일 대기해야 한다. 호주나 노르웨이는 더 열악하여 120일 이상 기다리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OECD 국가 통계에서 빠져있다. 집 문만 열고 나가면 당일, 아니 단 10분 만에 분야별 전문의를 만나 진료를 받고 피검사와 X-ray, CT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빠르고, 편리하며, 고품질을 자랑하는 1차 의료 인프라는 대한민국 보건의료를 지탱해 온 숨은 공헌자이자 국민적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세계가 부러워하던 대한민국의 1차 의료 시스템이 붕괴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원인은 보건복지부가 추진 중인 ‘검체검사 수탁제도 개편’과 ‘영상검사(CT·MRI 등) 수가 대폭 인하’ 정책이다.
정부의 구상은 단순하다. 의료기관이 외부 전문 검사기관에 위탁하는 혈액·소변 등 검체검사의 가격과 수수료를 강제로 인하하고, CT, MRI 등 영상검사의 가격을 대폭 깎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절감한 재정을 중증·응급 등 이른바 ‘필수의료’ 분야에 재투자하겠다는 논리다.
하지만 현장을 모르는 이러한 탁상행정은 1차 의료의 뿌리를 흔드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동네 의원은 대형병원처럼 자체 임상병리실이나 거대한 영상의학 센터를 갖추기 어렵다. 따라서 혈액 검사를 외부 전문 검사기관에 위탁하고, 가까운 영상의학과의원과의 협진을 통해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고 관리해 왔다. 그러나 검체수탁 수가와 수수료가 강제로 삭감되고 영상 수가마저 대폭 깎이면, 고가의 장비 유지비, 임상병리사 및 방사선사 인건비, 월세 등을 감당하지 못하는 1차 의료기관은 검사 기능 자체를 포기하거나 결국 폐업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것이 몰고 올 파장은 실로 참혹하다. 동네 의원에서 간편하게 피를 뽑아 당뇨나 간 질환, 고혈압을 관리하던 만성질환자들, 그리고 가까운 영상의학과 의원에서 CT나 초음파를 찍어 암과 심뇌혈관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던 환자들은 갈 곳을 잃는다. 결국 단순한 당뇨약 처방이나 기본 혈액검사, 정기 영상 검사를 받기 위해서도 대형 종합병원이나 상급종합병원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수개월 전부터 진료 예약 대기표를 뽑고 막대한 시간과 교통비, 진료비를 낭비하는 극심한 불편을 겪게 된다. 대형병원으로의 쏠림이 가중되면 3차 병원의 응급·중증 진료마저 연쇄적으로 마비되는 악순환이 완성된다. 필수의료를 살리겠다며 던진 정책이, 도리어 1차 의료를 파괴하고 3차 응급·중증 의료까지 연쇄 마비시키는 ‘의료 대재앙’의 도미노를 만드는 것이다. 필수의료 강화라는 ‘산토끼’를 잡겠다고, 대한민국 의료를 버티게 해준 1차 의료라는 ‘집토끼’의 목을 비트는 역대급 무능 행정이다.
과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베네치아 공화국은 천년의 영화를 누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이 번영을 누렸던 원동력은 바로 ‘무서운 수준의 공직 책임성’에 있었다. 베네치아에서는 모든 공직자가 임기를 마치면 즉시 ‘사후 감사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다. 최고 통치자인 도제(Doge)조차 예외가 없었다. 도제가 사망하면 별도의 위원회가 구성되어 임기 중 행적, 재정 지출, 법령 위반을 철저히 조사했다. 문제가 발견되면, 사망한 도제의 유산에서 벌금을 환수하고 심지어 유족에게까지 책임과 배상을 물었다. 또한 공직자 비리를 감시하는 ‘10인 위원회’를 운영하여, 누구든 비위나 직무 유기가 발견되면 해외로 도주하더라도 끝까지 추적하여 처벌했다. 권한에 따른 책임을 묻는 추상같은 제도가 존재했기에 베네치아는 부패하지 않고 천년의 번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
반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관료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탁상 위에서 펜대를 굴려 대충 정책을 만들어낸다. 그 정책이 현장의 의료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국민의 생명을 위협해도, 몇 년 후 순환보직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퇴직해 버리면 그만이다. 아무런 사후 책임도 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의료 현장이 무책임한 관료들의 실적 쌓기용 정책 실험실로 전락했다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공직자는 탁상에서 나온 가벼운 정책 하나가 현장의 맥을 끊고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보건당국은 일방적인 수가 인하와 제도 개편을 중단하고, 현장에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의료계와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서야 한다. 아울러 정책 실패에 대해서는 책임 소재를 묻는 엄격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권한이 있는 곳에 반드시 엄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오래된 지혜를 가슴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실패는 되풀이된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던 대한민국 1차 의료가 소리 소문 없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대로 정말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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