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나사 및 스페이스X 공식 홈페이지.
대한민국 제약바이오산업의 영토가 지구 저궤도를 넘어 우주 공간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전통적인 케미칼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 생산에 머물던 국내 기업들이 세계 최고 우주 기업인 스페이스X, 미국 항공우주국(NASA) 등과 손잡고 우주 개척 시대의 핵심 밸류체인으로의 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내 증시와 산업계에서 '우주·바이오 융합 3대장'으로 꼽히는 기업들은 각기 다른 독창적인 방식으로 우주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이들은 우주선에 탑재되는 첨단 소재부터 우주 공간 내 의료 인프라, 그리고 우주 환경 필수의약품까지 망라하며 실질적인 성과를 도출해내고 있다.
가장 드라마틱한 체질 개선을 이뤄내며 실적을 증명한 곳은 코스닥 상장사 '스피어(구 라이프시맨틱스)'다. 디지털 헬스케어 및 의료 인공지능(AI) 솔루션을 주력으로 삼던 이 기업은 우주항공 특수합금 전문기업인 스피어코리아와 흡수합병되며 우주항공 소재 기업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스피어의 무기는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와의 직접적인 공급 계약이다. 스피어는 스페이스X의 5대 핵심 초합금 공급업체(Tier-1) 지위를 확보하고, 오는 2035년까지 한화 약 1조 5,000억원 규모의 고성능 특수합금을 장기 공급하는 초대형 계약을 체결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이 같은 체질 개선은 곧바로 재무제표의 극적인 턴어라운드로 이어졌다. 지난 2024년까지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의 한계로 적자를 지속했으나, 우주항공 특수합금 매출이 본격 반영된 2025년 매출 956억원, 영업이익 91억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 올해는 매출 2367억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스피어가 기존의 바이오·메디컬 DNA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우주 사업과 융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피어는 피부암 영상검출 및 혈압 예측 의료 AI 솔루션, 개인건강기록(PHR) 플랫폼 '라이프레코드' 등의 기존 인프라를 유지하는 동시에 자회사 '라이프슈티컬'을 통한 원료의약품 및 건강기능식품 사업부를 효율화하여 캐시카우로 활용하고 있다.
전통 제약사 중 가장 과감하게 우주 영토를 넓히고 있는 주인공은 보령(구 보령제약)이다. 보령의 오너 3세인 김정균 대표는 "보령의 미래 두 축은 제약과 우주"라는 확고한 비전 아래, 우주선 하드웨어가 아닌 '우주의학 인프라'라는 틈새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을 취했다.
보령은 국제우주정거장(ISS)을 대체할 세계 최초의 민간 상업용 우주정거장을 건설 중인 미국 '액시엄 스페이스(Axiom Space)'에 6,000만 달러(약 908억원) 이상을 투자해 2.68%의 지분을 확보했다. 이어 국내 합작법인 '브랙스 스페이스'를 설립해 지구 저궤도 사업의 독점권을 쥐었다.
최근 김정균 대표는 액시엄 민간 우주정거장 내에 단순히 공간을 임대하는 수준을 넘어, 보령만의 독자적인 '우주의학 무인 연구소 모듈'을 직접 개발해 탑재하겠다는 구상을 구체화했다. 인간이 상주하기 어려운 미세중력 환경에서 AI와 로보틱스를 결합한 신약 스크리닝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엔지켐생명과학은 자사가 개발 중인 신약 후보물질 'EC-18(지질신약, PLAG)'을 앞세워 우주 환경의 가장 큰 위협인 방사선 피폭 치료제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는 우주비행사의 생존과 직결된 필수의약품 영역으로, 미국 정부 기관들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엔지켐생명과학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 및 우주건강중개연구소(TRISH)의 우주방사선 피폭 대응 연구 과제에 선정되어 미국 유수 대학들과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FDA로부터 급성방사선증후군(ARS) 치료제로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
EC-18은 항암화학방사선요법 유발 부작용인 중증 구강점막염(CRIOM) 치료제로도 임상 2상을 마치고 다음 단계를 밟고 있다. 방사선 노출 시 발생하는 과도한 면역 반응과 염증 물질을 신속히 제거하는 독특한 기전을 바탕으로 지상과 우주를 아우르는 방사선 치료 전문 신약으로 개발 중이다.
이들 3대장 외에 국내 우주 바이오벤처 생태계의 신진 세력들도 민간 우주 마켓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기업은 국내 최초로 우주 의약품 실험에 성공한 우주의학 전문 스타트업 '스페이스린텍'으로, 산업계와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스페이스린텍은 미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자체 개발한 무인 우주 의약품 시험 모듈 'BEE-PC1'을 발사해 NASA 우주비행사들과 함께 미세중력 공간 내 의약품 거동 실험을 개시했다. 지상 모사 인프라 구축을 위해 폐광산을 활용한 드롭 타워를 개발하는 등 저궤도 제조 플랫폼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의료 현장과 학계 중심의 연구 인프라 투자도 고도화되는 추세다.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박찬흠 교수팀은 보령의 우주 헬스케어 경진대회에서 우승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주 공간에서 줄기세포를 배양하고 인체 조직을 출력하는 장비인 '바이오캐비닛(Bio Cabinet)'을 개발해 재생의학 상용화를 이끌고 있다.
글로벌 우주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은 국내 기업들에게 새로운 상업적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글로벌 우주 산업 시장 규모는 향후 수년 내 1조 달러(약 1514조원)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 중 우주의학과 고기능성 특수 소재 부문이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과거 우주 산업이 발사체와 위성 중심의 국가 주도 사업이었다면, 이제는 민간 주도의 상업적 비즈니스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K-바이오가 가진 정밀 제조 역량과 신약 기전이 민간 우주 인프라와 결합하면서 고부가가치 신시장을 창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 제약바이오산업이 지상에서의 글로벌 주도권 경쟁을 넘어 지구 밖 우주 공간이라는 새로운 영토에서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내고 있다. 선제적 투자와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주 밸류체인 진입에 성공한 국내 기업들의 향후 행보에 전 세계 우주 및 바이오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