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층, 명분·감정보다 실리…젊은 총수들 소탈함도 ‘한몫’
서울 중구청 관계자가 지난 2019년 8월 6일 오전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에 제 74주년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와 함께 일본제품 불매와 일본여행 거부를 뜻하는 '노(보이콧) 재팬-No(Boycott) Japan' 배너기를 가로변에 설치하고 있다. <뉴시스>
[인사이트코리아 = 인사이트코리아]
문재인 정부 중반인 2019년. 한국사회에 ‘노 재팬’ 열풍이 일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핵심소재 수출을 통제한 데 따른 반발이었다. 반기업 정서도 고조됐다. 온 나라가 일본 불매운동으로 흥분했고, 기업인들은 수시로 법정에 불려나왔다.
2020년대를 관통하는 지금, 사회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본주의 키드(kid)’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원수 같던 이웃나라에 되레 친밀감을 느끼고, 탐욕의 화신처럼 그려지던 대기업 총수들을 유쾌한 밈(meme)으로 소비한다. 이 거대한 인식 전환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앞으로도 계속 이런 흐름이 이어질까?
‘노 재팬’ 대신 가성비와 취향
우선 반일 감정이 수그러든 현상은 방문객 통계로 확인된다. 작년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946만명으로 사상 최대였다. 올해는 1000만명을 넘길 전망이다. 노 재팬(No Japan)과 팬데믹 여파로 2021년 2만명 밑으로까지 떨어졌던 데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일본을 자주 찾다 보니 자연스레 호감도도 커졌다. 한국갤럽의 작년 8월 조사에서 일본 호감도가 38%로 36년 만에 가장 높았다. 이 비율이 2019년엔 12%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방송사들은 일본 연예인이 출연하는 한일 합작 예능프로그램을 앞다퉈 내보내고 있다. MBN ‘한일 가왕전’ ‘한일 톱텐쇼’, ENA ‘체인지 스트릿’ 등이 그런 사례다.
양국 관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중동 등 분쟁지역에서 자국민을 탈출시킬 때 우리 비행기에 일본인을, 일본 비행기에 한국인을 태워준다. 이 모든 게 불과 5~6년 새 변화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반일은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는 이슈였다. 좌파정권이든 우파정권이든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면 반일 카드를 꺼내들었다. 3년 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때만 해도 정치권에선 관성적으로 ‘반일 장사’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 재팬 때와는 달리, 국민의 호응은 신통치 않았다.
전문가들은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국가 간 역사 문제와 개인의 문화 소비를 분리하는 실용적 성향이 강해졌다고 분석한다. 한국은 일본과 대등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1990년대만 해도 일본의 1인당 소득은 한국의 3배에 달했지만 지금은 엇비슷하다.
K컬처 선풍 속에 문화적 자부심도 부쩍 높아졌다.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이 사라졌고, 집단주의적 강요에 대한 피로감도 상당하다. 젊은 세대일수록 명분보다 실리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다.
지정학적 여건이 급변해 우리 선택지가 비교적 분명해진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북한 핵과 중국의 급부상 속에 미국 중심의 안보구조에 속한 이상, 일본과의 협력은 필연에 가깝다. 반대로 중국은 산업 각 분야에서 한국에 위협적이고 동북아 정세에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이 호감에서 비호감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런 기류는 반일 감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 전반에 ‘감정보다 실리’를 중시하는 흐름은 반기업 정서 약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재벌 하면 정경유착, 경제권력, 독점, 문어발 등 부정적 단어부터 떠올렸다. 대중매체에선 탐욕과 비리 덩어리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그룹 총수들은 법 위에 군림하는 성역으로 비쳤고, 그 후계자인 2·3세는 영화 <베테랑>(2015년)의 조태오(유아인 분)처럼 망나니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요즘 그룹 회장들에 대한 대중의 감정은 호감에 더 가깝다. 세대 교체로 부쩍 젊어진 총수들은 ‘근엄한 회장님’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로 적극 소통하거나 서민적 풍모를 노출해 대중의 호감을 사고 있다. 이재용 회장의 ‘쉿’ ‘오뎅 먹방’ 같은 인터넷 밈이 대표적이다. 계열사 주가가 급등하자 이재용·최태원·정의선·김승연 회장 등이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타!’라는 릴레이 밈에 차례로 소환되기도 했다. 총수를 부르는 호칭도 ‘JY, 재드래곤’(이재용), ‘용진이 형’(정용진) 같은 식이다. 과거 폭군 이미지였던 김승연 회장조차 젊은 세대에게 ‘의리왕, 상남자’로 통한다.
‘공공의 적’ vs. ‘내 계좌의 동반자’
반기업 정서가 수그러든 이유가 단순히 이미지 메이킹만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 팬데믹과 미·중 갈등을 겪으며 한국인의 기업관(觀)이 긍정적으로 교정되고 있다. 정부의 한계를 간판 대기업들이 메우면서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고, ‘기업이 살아야 양질의 일자리가 생긴다’는 인식이다.
기업 역시 본업 못지않게 평판 관리에 크게 신경을 쓴다. 갑질, 비리, 불법행위 등으로 평판이 망가져 기업이 위기에 처한 반면교사가 한둘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대세가 된 ESG 경영이 국내에 쉽게 뿌리내린 것도 그런 맥락이다.
둘째, 어디를 가나 주식 얘기가 화제일 만큼, 전 국민 주주화(化)도 한몫 했다. 주식투자자가 1456만명(2025년)에 달한다. 기업 실적이 개선되면 주가가 올라가고, 내 계좌 수익률이 올라간다. 자본주의 키드에게 기업은 타도해야 할 ‘공공의 적(敵)’이 아니라 내 자산을 꾸준히 불려줄 ‘동반자’다.
반일 감정은 언제든 불씨만 있으면 활활 타오를 인화성 강한 재료다. 위안부, 독도, 역사교과서 등 뇌관이 즐비하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자 일본에선 ‘문재인 정부 시즌2’가 될까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실용정부를 지향하면서 양국 관계는 비교적 잘 관리되는 편이다. 더구나 당면한 국제 정세가 과거사 시비에 치중하기엔 너무 긴박하게 돌아간다.
반기업 정서도 일단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국내 투 톱 기업이 반도체 슈퍼 사이클의 최대 수혜자이고, 방산 조선 원자력 등에서 기업들이 괄목할 성과를 내는데 박수를 아낄 국민은 없다. 하지만 쿠팡 사태에서 보듯, 기업의 잘못을 매섭게 질타하는 여론도 엄연히 존재한다. 담합, 분식회계, 횡령, 사고 등도 마찬가지다.
‘자나 깨나 불조심’은 필수다. 반일과 반기업은 다 끝난 사(死)화산이 아니라 언제 되살아날지 모를 휴(休)화산이기 때문이다.
인사이트코리아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