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지난 주 금요일, 삼성전자 초기업노조에 공문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발신은 삼성전자 본사. 문서번호에는 26-006번이 찍혀 있었습니다.
제목부터 깁니다. '4월 23일(목) 집회 관련 안전보호시설 유지·운영 업무 정상 수행 및 지도·관리 책임 이행 요청.' 한 줄로 요약하면 "23일 평택 집회에 참여하더라도, 회사가 안전상 필수라고 판단한 핵심 파트 143개는 평소처럼 정상 가동될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입니다.
143개라는 숫자가 눈에 띕니다. 별지에 붙은 파트 명단을 보면 소방·전기·가스처럼 사고가 나면 사람이 다칠 수 있는 라인들은 물론이고, AI센터 산하 일부 파트까지 폭넓게 올라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사측이 "이 파트들이 멈추면 안전이나 설비 측면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한 라인을 추린 리스트인 셈입니다. 사측은 공문에서 노동조합법 조항과 관련 법원 판례를 인용하며 "쟁의 기간에도 이 파트들은 평상시 수준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사측이 인용한 법 조항은 노조법 제42조 제2항으로, "사업장의 안전보호시설에 대하여 정상적인 유지·운영을 정지·폐지 또는 방해하는 행위는 쟁의행위로서 이를 행할 수 없다"고 명시한 조항입니다. 아울러 사측은 노조법에서 명시하는 '필수유지업무'와 관련해 "법원이 필수유지업무 유지·운영 수준을 쟁의행위 기간에도 평상시의 100%로 보는 것이 필요 최소한의 범위에 해당된다고 판단한 판례가 있다"고 공문 내용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현행 노조법은 ▲철도·도시철도·항공운수사업 ▲수도·전기·가스사업 ▲석유정제 및 석유공급사업 ▲병원 및 혈액공급사업 ▲한국은행사업 ▲통신사업 등이 해당하는 '필수공익사업'의 업무 중 그 업무가 정지되거나 폐지되는 경우 공중의 생명·건강 또는 신체의 안전이나 공중의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는 업무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업무를 '필수유지업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공문의 무게는 생각보다 묵직합니다. 단순한 업무 협조 요청이 아니라, 오는 23일 결기대회와 5월 총파업을 앞두고 사측이 "이 선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긋는 사전 포석의 성격이 짙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핵심 설비와 안전 라인이 쟁의로 흔들리는 상황을 미리 차단해두겠다는 의도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노조 측은 빠르게 맞대응했습니다.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와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전삼노)은 각각 조합원 공지와 공식 입장문을 통해 공문 내용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논리의 핵심은 법리 해석 차이입니다. 초기업노조 측은 법무법인의 자문을 근거로 "삼성전자 사업장은 법이 정한 필수공익사업장에 해당하지 않는 만큼, 사측이 인용한 조항과 판례를 이 사안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쟁의 기간에 인력을 어느 수준까지 유지할지는 노사 간 합의로 정할 사안이지, 회사가 일방적으로 범위와 수준을 정할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전삼노는 한발 더 나아간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입장문에서 "회사가 시설 목록을 포괄적으로 나열한 공문을 보내 그 구체화를 노조에 떠넘기는 것은, 노조를 잠재적 파괴자로 낙인찍고 공문 무대응을 토대로 향후 가처분 신청 등 소송의 증거로 활용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공문 자체가 안전 확보의 목적이 아니라 향후 법적 공방을 대비한 사전 장치라는 해석입니다. 또 "안전보호시설의 범위 특정과 필요 인력 산출은 1차적으로 사용자인 회사의 책임"이라며, 사측이 DS부문 전체 캠퍼스의 공정별 구체적인 최소 인력 데이터를 먼저 제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같은 공문을 놓고 양측 입장은 정반대로 갈려 있습니다. 사측은 "안전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요구"라는 쪽이고, 노조는 "쟁의권의 실질적 제약이자 책임 전가"라는 쪽입니다.
그사이 노사 갈등과 맞물린 일정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흘 뒤인 23일 목요일엔 평택에서 공동투쟁본부 주도의 결의대회가 예정돼 있습니다. 노조가 전망한 참가 규모는 3~4만명.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공동투쟁본부는 5월 21일부터 영업일 기준 18일간의 총파업도 예고해둔 상태입니다. 이번 주를 기점으로 총파업 디데이가 한 달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삼성전자 창사 이래 두 번째 총파업이 가시화되는 모습입니다.
지난 주 사측이 노조에 보낸 공문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양측이 드러낸 입장차는, 삼성전자의 노사 갈등이 한층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화 테이블 대신 공문이 오가는 방식으로 노사가 소통하는 국면, 5월 총파업을 앞두고 양측의 거리는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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