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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어느 시대나 '꿈꾸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한 잔]

1968년 파리, 미국인 유학생 ‘매튜’는 어두운 영화관 속 스크린에 바짝 다가가 앉는다. 영사기 불빛이 앞자리 관객에게 묻어 더럽혀지기 전, 가장 먼저 온몸으로 받아내기 위해서다.

어느 시대나 '꿈꾸는 사람'은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한 잔]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몽상가들>(2003)

1960년대 파리서 만난 젊은 영혼들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서로 다른 선택

누구나 ‘몽상가’ 시절 간직하고 있어

꿈꾸기 멈추지 않을 때, 존엄 빛나

영화 <몽상가들> 한 장면. /갈무리

1968년 파리, 미국인 유학생 ‘매튜’는 어두운 영화관 속 스크린에 바짝 다가가 앉는다. 영사기 불빛이 앞자리 관객에게 묻어 더럽혀지기 전, 가장 먼저 온몸으로 받아내기 위해서다.

그의 삶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던 예술과 자유의 상징,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외압으로 인해 폐쇄되자 거친 반대 시위가 일어난다. 시위의 물결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던 매튜의 앞에 쌍둥이 남매 ‘이사벨’과 ‘테오’가 나타난다. 광장 앞에서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는 남매의 부모가 집을 비운 한 달 동안 아파트라는 닫힌 공간으로 옮겨간다.

세 청춘은 세상과의 문을 잠근 채 자신들만의 밀실을 구축한다. 이들은 영화 속 명장면과 대사를 퀴즈로 내며 벌칙을 주고받고, 고전 명화의 포즈와 거장의 연출을 일상에서 온몸으로 재현하며 묘한 관능과 은밀한 유대감을 쌓아간다. 이 아파트는 예술과 자유가 숨 쉬는 낙원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 감각이 마비된 채 자기들만의 환상 속에 고립돼 가고 이들의 행동에는 기묘한 균열이 생긴다.

아파트의 창문을 깨고 날아든 시위대의 돌멩이는 그들의 유토피아를 강제로 깨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사벨과 테오는 망설임 없이 화염병을 들고 투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창문이 깨짐과 동시에 환상에서 깨어난 매튜는 폭력적인 현실에 거부감을 느끼며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다. 예술은 도피처가 될 것인가, 현실에 대한 투쟁이 될 것인가.

영화 <몽상가들> 한 장면. /갈무리

오늘날 우리가 이 투쟁의 언어를 배우고 나눌 수 있는 터전은 점차 시들어 가고 있다. 최근 국내 영화제들이 지자체의 예산 삭감과 정치적 외풍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잇따라 축소되거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영화제는 단순히 작품을 상영하는 행사가 아닌 시대를 고민하는 몽상가들이 모여 낯선 시선을 나누고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던 소중한 광장이었다. 정치적 셈법과 경제적 논리에 밀려 스크린의 불이 꺼질 때, 우리는 다양성을 담아낼 그릇과 시대의 온기를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에게도 누구나 몽상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밤을 새워 시집을 읽고, 비주류 영화의 한 장면 때문에 가슴을 졸이며, 세상의 불합리에 분노하고 타인의 아픔에 깊이 동화되기도 했다. 비록 세월의 무게와 효율을 강요하는 세상 속에서 그 시절의 열정은 점차 희미해졌을지라도, 스크린을 향해 눈을 반짝이던 그 청춘의 감각만큼은 우리 유전자 깊은 곳에 남아 있다.

현실의 벽이 아무리 견고하고 스크린이 하나둘 꺼져갈지라도, 인간은 스스로 몽상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기계와 구분되는 존엄을 가진다. 1968년 파리의 거리에 불어닥친 바리케이드 너머로 영화를 외치던 그들처럼, 이 차가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몽상가의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꾸어야 한다. 스크린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스스로 몽상가가 돼 서로의 인간성을 증명해 내야 한다.

우리를 다시 꿈꾸게 할 <몽상가들>은 현재 재개봉해 창원 예술영화관 ‘씨네아트 리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씨네아트 리좀은 이달 관람 환경을 전면 업그레이드해, 더욱 선명해진 화질과 깊어진 사운드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조이슬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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