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희 플랜텍 상임감사(前 전력거래소 이사장)
유상희 플랜텍 상임감사(前 전력거래소 이사장)
[이투뉴스 시론 / 유상희] 인공지능(AI) 시대의 진짜 병목은 반도체가 아니라 전력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AI 데이터센터 하나에 원자력 발전소 하나씩 매치해야 할 정도”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이 발언은 세계 산업의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적 신호다. AI의 확장은 반도체 산업을 넘어 전력과 에너지 시스템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AI 산업의 핵심에는 ‘괴물칩’이라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적층해 GPU에 초고속 데이터를 공급하는 기술로 대규모 AI 연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부품이다. 생성형 AI와 초대형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메모리 수요는 공급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HBM 생산 확대를 선언한 것도 이러한 구조 변화의 결과다.
그러나 AI 산업의 병목은 결국 전력이다. 초대형 AI 데이터센터는 이미 수백 메가와트(MW)의 전력을 소비하며 향후 단일 클러스터 기준 기가와트(GW)급 전력 수요로 확대될 전망이다. 반도체 생산 공정 역시 대표적인 대규모 전력 소비 산업이다. 결국 AI 산업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가 결합된 거대한 산업 시스템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경기도 용인에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장기적으로 10GW 내외의 전력이 필요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 단지도 공장 확장이 진행될수록 수 기가와트(GW) 수준의 추가 전력 수요가 예상된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까지 결합되면 산업단지 전력 수요는 급격히 증가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신규 송전망과 변전 설비 구축에는 보통 7~10년 이상이 걸리며 인허가와 지역 갈등으로 더 지연되는 경우도 많다. 반면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는 이미 2020년대 후반 가동을 목표로 건설 일정이 진행되고 있다. 산업 투자 속도에 비해 전력 인프라 구축이 늦어질 경우 국가 핵심 산업의 성장 자체가 제약될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가 필요로 하는 전력은 단순히 ‘많은 전력’이 아니다. 글로벌 AI 기업들이 선호하는 전력은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이면서 동시에 탄소 배출이 낮은 저탄소 전력이다. 초대형 데이터센터는 수백 메가와트에서 기가와트 규모 전력을 지속적으로 소비하기 때문에 전압과 주파수가 안정된 고품질 전력이 필요하다. 또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이루어지는 만큼 전력 공급도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으로 확보돼야 한다.
이 때문에 최근 산업계에서는 데이터센터와 발전 설비를 함께 구축하는 ‘전력-데이터센터 통합 모델’이 논의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자가발전이 아니라 통합 전력 시스템에 가깝다. 안정적인 기저전력과 재생에너지,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BESS), 수요반응(DR), 그리고 이를 제어하는 에너지관리시스템(EMS)과 스마트그리드 기술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동시에 이러한 전력 공급 체계는 저탄소 전원을 중심으로 설계돼야 한다.
미국에서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AI 수요에 대응하여 산업 전략 차원에서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력 확보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펜실베이니아 쓰리마일섬 원전 재가동 프로젝트와 연계해 데이터센터 전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구글과 아마존 역시 장기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을 통해 대규모 풍력과 태양광 전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데이터센터 운영 전력을 시간 단위로 무탄소 전력과 맞추는 ‘24/7 Carbon-Free Energy’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이는 AI 산업 경쟁력이 안정적이고 저탄소 전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은 데이터센터 전력의 저탄소 전환과 에너지 효율 기준을 강화하고 폐열 회수와 재생에너지 활용을 제도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2030년을 목표로 풍력과 배터리, 데이터센터를 결합한 지역 전력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AI 칩을 얼마나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니다. 그 칩을 돌릴 전력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것인가가 산업 전략의 핵심이다. AI 경쟁의 본질은 반도체 기술 경쟁을 넘어 전력 확보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산업 투자 속도와 전력 인프라 구축 속도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국가 핵심 산업 성장 자체가 제약될 수 있다.
따라서 데이터센터와 첨단 산업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 단위 저탄소 전력 시스템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 송전망 인허가 제도 개선, 전력 시장 제도 개편, 산업단지 전력 인프라 투자 확대 등 보다 과감한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이제 전력 정책은 에너지 정책을 넘어 국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이다.
AI 시대에는 반도체 기술뿐 아니라 전력 시스템을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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