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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세계의 시, 시의 세계]비가

빈센트 밀레이는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페미니즘과 자유연애의 아이콘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소네트 형식을 즐겨 썼는데,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자유시 형식이다.

[세계의 시, 시의 세계]비가

세계의 시, 시의 세계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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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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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얘들아.

너희 아버지가 죽었단다.

그의 낡은 코트들로

너희에게 작은 자켓을 만들어 주마.

그의 낡은 바지들로

너희에게 작은 바지를 만들어 주마.

그의 호주머니 안엔 그가 거기

넣곤 했던 물건들이 있겠지.

담배로 찌든

열쇠들과 동전들이.

댄은 동전들을 줄테니

저금통에 저금하렴.

앤은 열쇠들을 줄테니 그걸로

꽤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겠지.

삶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죽은 사람은 잊혀져야만 한다.

삶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착한 사람들이 죽는다 하더라도.

앤, 아침밥을 먹어라.

댄, 네 약을 먹어라.

삶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 빈센트 밀레이(1892~1950)

빈센트 밀레이는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페미니즘과 자유연애의 아이콘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소네트 형식을 즐겨 썼는데, 이 시는 연 구분이 없는 자유시 형식이다. 제목이 ‘비가(Lament)’이지만, 화자는 탄식보다는 간결하고 단호한 구어체로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 그 목소리에서 이혼 후에 세 딸을 혼자 키운 밀레이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된다. 밀레이는 슬픔 속에서도 일상을 지속해야 하는 어머니를 보며 성장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삶을 이 시는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낡은 코트들과 바지들로 아이들의 작은 자켓과 바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은 망자의 부재를 다른 방식으로 봉합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유산은 “담배로 찌든 열쇠들과 동전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죽은 사람은 잊혀져야만 한다”고 화자는 선언한다. 아이들의 이름인 ‘앤’과 ‘댄’ 역시 “and then”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에서 애써 다잡은 마음이 무너져내린다. “삶은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외치지만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 그 안간힘이 이 시를 ‘비가’로 완성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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