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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성경, 해석이라는 산을 넘어 생명의 숲으로

인공지능(AI)이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문해력(Literacy)'이다. 설교자에게는 바른 메시지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청중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성경, 해석이라는 산을 넘어 생명의 숲으로

성경, 해석이라는 산을 넘어 생명의 숲으로

[ 목양칼럼 ]

라종렬 목사

2026년 03월 19일(목) 22:44

우리의 삶은 비루한 일상의 숲을 지나 거룩한 영토로 나아가는 긴 여정이다. 그 여정의 길목마다 우리는 '말씀'이라는 등불을 만난다. 오랫동안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것은, 성경은 그저 평평한 평지가 아니라 깊은 골짜기와 높은 준령을 품은 거대한 산맥과 같다는 사실이다. 읽고, 이해하고, 믿고, 인도함을 받는 매 순간마다 우리는 고비를 만난다. 그리고 그 고비의 정점에는 언제나 '해석'이라는 실존적 과제가 놓여 있다.

성도들은 성경을 다독하고 암기하며 통독의 길을 걷는다. 그 경건한 노고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믿으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더 깊이 믿어진다"는 성 안셀무스의 고백이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말이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반드시 바른 해석의 토대 위에 서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무작정 읽어내고 암기하며, 그것만으로 신비한 능력이나 응답이 임할 것이라 기대하는 태도는 초보적 신앙에서는 유효할지 모르나, 신앙의 연조가 깊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위험한 함정이 된다. 이는 '믿음'이라는 고귀한 단어를 오남용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에는 반드시 땀 흘리는 연구와 공부의 과정이 요청된다.

목회 현장에서 수평 이동해 온 교인들이나 다양한 교파의 성도들을 만나다 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올 때가 많다. 봉사에는 열심이고 기도에는 특심이지만, 정작 자신의 인격과 지식의 한계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신앙의 정체기를 겪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러 봉사와 헌신의 요구에 지쳐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생각하고 정리할 겨를도 없이 신앙의 여정을 헉헉대며 가고 있다. 그러다 삶의 고난이 닥쳐오면 신앙 안에서 지혜롭게 매듭을 풀지 못하고, 그저 '치성(致誠)'에 가까운 기도로만 일관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져 방황하곤 한다. 그들에게 '해석'의 필요성을 조심스레 건네면, 처음에는 생소해하다가도 곧 자신의 신앙 여정에 결여되었던 상식과 교양의 빈자리를 발견하곤 눈을 반짝인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닫혔던 문이 열리는 출구의 희망을 본다.

냉정하게 말해, 오늘날 성도들의 성경 해석 틀은 오랫동안 들어온 목회자의 설교 스타일에 고착되어 있다. 만약 강단에서 원어와 문학,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문학적·철학적 통찰이 녹아든 깊은 연구가 선행되었다면, 성도들 또한 풍성한 해석의 도구들을 자연스럽게 익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과도한 설교의 짐을 짊어진 목회자들이 본문을 깊이 천착(穿鑿)하지 못한 채 설교를 생산해내야 하는 구조적인 아픔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깊이 없는 설교는 결국 성도들의 영적 문해력을 약화시킨다. 성경 해석의 역사나 재해석의 예를 들어 신앙적 질문에 답할 때, 어떤 이들은 그런 읽기가 불경하다며 두려워하거나, 골치 아픈 공부는 목회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그저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곤 한다. 조금만 깊은 이야기를 건네도 '복잡하다', '어렵다'며 애써 말씀의 현실성과 적실성을 부인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다.

인공지능(AI)이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문해력(Literacy)'이다. 설교자에게는 바른 메시지를 길어 올리는 능력이, 청중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신앙의 문해력은 곧 '분별력'이다. 이제는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수준을 넘어, 세상을 가득 채운 다양한 매체와 시류 속에 담긴 의미를 해독하는 복합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성경과 설교를 대할 때 우리는 신학적 안목과 영적 분별력을 갖추기 위해 배움과 훈련의 자리를 기꺼이 지켜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읽은 성경이, 그리고 우리가 해석해 낸 말씀이 어느 순간 나와 우리, 그리고 이 시대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전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변화와 성숙은 내가 익숙해진 관점을 내려놓고 '다른 시각'을 마주할 때 시작된다. 그래야만 내가 어디에 고착되어 있었는지, 무엇을 소홀히 여겼는지를 알게 된다. 얽히고설킨 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지혜도 거기서 나온다. 성경은 결코 닫힌 고전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통로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낯선 진리의 세계로 초대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삶을 세밀하게 해석하여 인도해 주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이것은 '해석'이라는 도구가 올바로 작동할 때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신비다.

교회사 속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나타난 세 가지 흐름은 교권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성서주의다. 이 세 가지는 신앙의 균형을 위해 모두 필요하지만, 성경의 참된 권위를 간과하고 해석의 치열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것들은 그저 맹목적인 '주의(-ism)'가 되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다.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문해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이들이다. 수많은 이단과 시류의 도전, 그리고 무수한 매체를 통해 다가오는 사상적 파고 앞에 우리가 견고한 응전(應戰)을 펼칠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해석하며 훈련하는 길뿐이다.

해석의 고통을 통과해 생명의 숲으로 나아가는 모든 성도 위에,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과 오만한 자의 자리를 분별하는 지혜가 임하기를 소망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의 말씀 속에 감추어진 비밀한 능력들을 발견하며, 주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기쁨이 가득하시길 기원한다.

라종렬 목사 / 광양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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