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맞은 탈탄소]
화석연료와 ‘질서 있는 퇴장’
탈탄소는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의 속도로 진행돼야 하는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은 에너지 수급과 안보뿐 아니라 에너지 전환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이번 사태가 던진 질문을 포함해 글로벌 탈탄소가 맞닥뜨린 현실과 그에 대한 고민을 연속해서 짚어보겠습니다.
서울 시내 한 주유소 모습. 연합뉴스
“1970년대 1·2차 오일 쇼크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를 합한 것보다 더 심각하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최근 미·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발생한 에너지 위기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하는 중동산 석유와 LNG는 각각 전체 공급량의 2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IEA에 따르면 이번 전쟁으로 감소한 세계 석유 공급량은 하루 1100만 배럴로 1·2차 오일 쇼크 당시 차질을 빚었던 석유 공급 규모의 2배 이상입니다. 줄어든 액화천연가스(LNG) 공급량 약 1400억㎥는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발생한 750억㎥의 2배에 가깝고요. 비롤 사무총장은 “세계 경제가 중대한 위협에 직면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미래’
한마디로 20%에 해당하는 석유와 가스가 시장에서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현재 탄소 배출량이 많은 화석연료 비중을 축소하는 탈탄소가 진행되고 있죠. 에너지 전환이 계속된다면, 석유·가스 20%가 사라진 현재 상황은 언젠가 우리가 맞닥뜨릴 미래의 한 지점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계기로 먼저 살펴본 미래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반갑다고 말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국제유가(브렌트유 기준)는 전쟁 전보다 약 50% 가까이 치솟았습니다. 전쟁 전까지 원유 시장에 잇따랐던 공급 과잉 우려는 이제 ‘수급 불안’ 경고로 뒤바뀌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우리나라만 봐도 에너지 위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31일 에너지 수급 위기가 긴급할 경우 “헌법이 정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요. 이 대통령은 “대외 의존도가 높고 중동 지역으로부터 에너지 수급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더욱 철저한 점검과 치밀한 비상 대책이 요구된다”고 강조했습니다. ,
26일(현지 시간) 인도 뭄바이의 한 가스 공급소 인근에서 액화석유가스(LPG)를 받기 위한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EPA연합뉴스
석탄의 역습
하지만 급격한 에너지 공급 축소는 탄소 감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시아 국가들이 석탄 발전과 생산량을 더 늘려 ‘에너지 공백’ 대응에 나섰기 때문인데요. 인도를 포함해 태국과 방글라데시는 석탄 발전소 가동률을 최고로 높였다고 합니다. 세계 최대 석탄 수출국 인도네시아는 탄광 업체들이 석탄 생산량을 늘리도록 허용하기로 했고요. 일본은 4월부터 1년 간 석탄 화력 발전소 가동률을 높이는 긴급 조치에 들어갑니다. 석탄 발전은 인공지능(AI) 확산으로 인한 전력 수요 급증으로 활용도가 다시 높아지는 ‘유턴’을 겪고 있는데, 중동발(發) 에너지 위기는 이 추세를 강화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탈탄소, 구호보다 ‘세밀한 설계도’가 필요하다
즉 이번 전쟁으로 인한 각종 충격파는 에너지 전환이 연착륙이 아닌 경착륙을 했을 때 벌어질 사태의 예고편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해 노트르담대 키오스쿨의 에밀리 그루버트 지속가능 에너지 정책 부교수는 “탄소 ‘제로’로 점진적 전환뿐 아니라 화석연료의 단계적 폐지를 포함하는 명확하고, 잘 조율된 계획이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요. ‘질서 있는’ 화석연료 퇴장이 이행돼야 탈탄소가 잘 이행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출처: Designing the mid-transition: A review of medium-term challenges for coordinated decarbonization in the United States, 2022) 그루버트는 이를 위해 ‘중간 전환(mid-transition)’을 세밀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투자은행(IB) 바클레이즈도 현재 “전력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에너지 공급과 산업 생산, 전력 시스템을 동시에 재구성하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는데요. 그 결과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는 화석연료 설비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화석연료 설비에 중첩되어 추가되고 있는 식이라는 설명입니다. 이에 따라 전력망에 연결되지 않은 재생에너지는 ‘좌초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에너지 전환으로 화석연료가 좌초 자산화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오히려 재생에너지 가치가 떨어지는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이번 전쟁이 보여준 ‘경착륙’ 시나리오는 정교한 설계 없는 탈탄소 위험성을 시사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유(Petro)에서 전기(Electro)까지. 에너지는 경제와 산업, 국제 정세와 기후변화 대응을 파악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조양준의 페트로-일렉트로] 연재 구독을 누르시면 에너지로 이해하는 투자 정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