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타임즈뉴스 = 서연옥 기자] 반도체 산업은 흔히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시장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공급망입니다. 어떤 기업이 핵심 부품을 쥐고 있는지, 누가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지가 거래 관계의 힘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이번 브로드컴 판결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이같은 냉정한 현실을 다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서울고법은 최근 브로드컴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공정위는 브로드컴이 삼성전자에 장기 공급계약 체결을 압박하며 거래상 우월적 지위를 남용했다고 보고 191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브로드컴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번 사건이 더 주목받는 이유는 상대가 삼성전자였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스마트폰과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최상위권 경쟁력을 가진 삼성전자조차 특정 부품 공급망 앞에서는 협상력이 제한될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브로드컴은 삼성전자가 일부 부품에서 경쟁사 제품 채택을 검토하자 장기계약 체결을 요구하며 압박 강도를 높였습니다. 삼성전자가 물량 부담과 손실 가능성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자 구매 승인 지연과 공급 차질 가능성을 거론하며 사실상 선택지를 좁혀갔다는 게 공정위 판단입니다.
결국 삼성전자는 매년 최소 7억6000만달러 규모의 부품을 구매하는 장기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계약 물량을 채우지 못하면 차액까지 부담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이후 상황은 더 상징적입니다. 삼성전자는 일부 경쟁사 부품 대신 가격이 더 높은 브로드컴 제품을 채택했고, 갤럭시S21 일부 모델의 부품 구성도 변경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단순히 거래 조건 하나가 바뀐 수준이 아니라 제품 전략과 원가 구조까지 영향을 받은 셈이지요.
이번 사건은 특정 글로벌 기업의 ‘갑질’ 문제만으로 보기에는 시사하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AI 반도체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핵심 기술과 부품을 확보한 기업들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습니다. 공급망을 장악한 기업이 가격과 물량, 계약 조건까지 사실상 좌우하는 흐름도 갈수록 강해지는 모습입니다.
최근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AI 칩 개발에 뛰어드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특정 업체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공급 차질과 가격 부담, 협상력 약화 같은 위험이 함께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 역시 이번 일을 계기로 공급망 다변화 필요성을 다시 절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규모와 영향력이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핵심 부품 하나만 흔들려도 생산 일정과 제품 전략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현실이 드러난 셈입니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공정거래 사건 이상의 의미를 남겼습니다. 결국 반도체 시장에서 마지막까지 주도권을 쥐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공급망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킨 판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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