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964년 9월 27일. 국내 첫 주간지 ‘주간한국’은 32면의 타블로이드판 시사주간지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창간 후 4년 뒤 주간한국은 41만 5000부를 인쇄하면서 국내 일간지 및 종합지 등 모든 정기간행물을 통틀어 최대 부수를 발행했습니다. 오락이 배고프던 때 당시 8면이던 일간신문으로는 요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대중가요가 지면에 소개된 것은 주간한국이 처음이었습니다. 삼성 이병철 회장과 유일하게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를 단독 인터뷰한 것도 주간한국이었습니다.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온라인 플랫폼이 난무하는 현시대에 과거 주간한국의 기지와 재미, 엉뚱한 착상 등을 되살릴 수 있는 콘텐츠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시대가 변해도 소재만 다를 뿐 주간한국 전성기의 제작 기법은 현재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주간한국 박현영 기자] 캐나다 정부는 지난 6일(현지 시간) 총 60조원 규모 차기 잠수함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독일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즈(TKMS)를 선정했다. 수주 경쟁에 온 힘을 다했던 우리 정부와 조선업계는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그럼에도 이번 경쟁은 헛되지 않았다. 한국 잠수함이 독일 등 기존 글로벌 강자와 경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잠수함은 장기간 잠항능력 및 고강도·고내구성 적용 등 고난도의 조선 기술이 필요하고, 각종 방위 산업의 첨단 기술도 탑재된다. 이에 전 세계에서 잠수함을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건조할 수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독일을 포함해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 10여 개국에 불과하다. 이들 국가는 오랜 기간 강대국으로 분류돼 온 국가이기도 하다. 이번 캐나다 잠수함 수주전에서 한국이 독일과 치열하게 경쟁했다는 사실은 전통적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는 의미다.
주간한국 1970년 3월 1일(제283호)자 10면에 보도된 한국 조선업 관련 기사. 사진=주간한국DB
1970년 첫 선박 수출…대만에 250톤급 어선 인도
우리나라는 지난해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2위 자리를 지켰다. 1위를 기록한 중국 조선업계는 자국 발주 물량과 저비용 선박을 앞세워 선두를 차지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단순 수주량 경쟁보다 고부가가치·친환경 선박을 중심으로 고수익을 올렸다. 특히 ‘선박 기술의 꽃’이라고 불리는 액화천연가스(LNG)선 시장은 우리나라가 6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비싸고 좋은 배는 한국 조선소에서 만들어진다’는 글로벌 공식은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실제 1970년, 우리나라는 대만에 250톤급 어선을 수출한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나아가 일본에 2만 5000톤급 화물선을 수주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당시 주간한국은 부산 영도에 위치한 대한조선공사(현 HJ중공업)를 직접 찾아 한국 조선업 성장을 함께 축하했다.
주간한국 1970년 3월 1일자(제283호) 10면에는 ‘한국 사람이 어느새…외국배 2만 5000톤급을 만든다’라는 자부심 가득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선 1970년을 ‘조선 혁명’의 해라고 언급, 백제 이후 1300년 만에 우리의 전통적인 조선 기술이 되살아났다고 강조했다. 특히 당시 자유중국(현 대만)에 250톤급 어선 20척을 전달한 후 2만 5000톤급 선박 건조에 들어간 사실을 ‘근대화의 발돋움’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신 인터뷰에 응한 한국조선공사 부산공장 공장장은 “2만 5000톤급이 무슨 문제가 되냐”며 “머지않아 30만 톤급(유조선)도 만들어낼 것”이라며 자신만만했다. 희망에 불과했던 당시 공장장의 말은 50여 년이 지난 후 현실이 됐다.
기사는 일본이 대한조선공사에 화물선 건조를 의뢰한 이유에 대해 주목했다. 부산조선소 소장은 ‘일본이 큰 공사를 하필이면 한국에 주문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조선공사에서 만든 대만 선박(어선)이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기사에 따르면 대한조선공사는 1968년 5월 일본, 서독(독일), 홍콩 등이 참가한 국제 입찰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대만 선박 250톤급 20척을 만들어주기로 낙찰됐다. 특히 1968년 말부터 선박 건조에 들어간 후, 의장 공사를 60일 만에 완료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의장 공사는 뼈대만 완성된 선체(선각)에 운항과 거주에 필요한 모든 부품을 설치하고 연결, 배를 하나의 완성된 시스템으로 만드는 핵심 공정이다. 또 일본 중공업 기업 가운데 하나인 IHI와 기술 제휴를 통해 진수 후 1년간 보증 기간도 마련해 국제적으로 신망을 높였다.
주간한국 1970년 3월 1일(제283호)자 11면에 보도된 한국 조선업 관련 기사. 사진=주간한국DB
이 밖에 기사는 대만 측과의 마찰 상황도 소개했다. 당시 대한조선공사는 저마다 다른 대만 선주들의 간섭에 골치를 앓았다. 요구 사항이 많았던 것. 또 대만은 중국국제검사관을 통해 선박 품질 관리에 트집을 잡기로 유명했는데, 대한조선공사는 연구소 기술진이 국제 규격대로 철저하게 진행해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각별히 신경 쓴 결과, 조선소장이 최종 인도를 위해 대만을 방문했을 때 각 선주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고도 전했다.
대만에 선박 20척을 성공적으로 인도한 후 대한조선공사의 평판은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게 됐다. 당시 기사는 대만 선박 이후, 일본에 2만 5000톤급 4척 건조를 위탁받았고, 이후 미국, 그리스 등에서도 선박 건조를 타진 중이라고 전했다. 당시 대한조선공사 총무이사는 “장차 1975년쯤 되면 국내에서 30만톤급 유조선을 만들어내 국제 경쟁도 할 작정”이라고 자신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선박 수출 과업을 달성한 부산조선소가 올린 수출 실적은 1969년 기준 614만 달러였다. 57년이 지난 지난해 국내 조선 3사 기준 총수주액은 359억 3000만 달러(약 54조 387억원)다. 물가 변동에 따른 화폐 가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국내 조선업은 불과 60여 년이 채 지나기 전에 약 5850배나 성장한 셈이다. 1970년 당시 주간한국은 ‘우리의 눈길을 해양 한국으로 돌려보자’며 조선업 성장을 강조했다. 현재도 주간한국은 세계 강국이 된 한국 조선업의 기사를 써 내려가며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박현영 기자 hypark@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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