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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줌인 아웃] 다비드 별의 눈물은 이제 그만!

[백정우의 줌인 아웃] 다비드 별의 눈물은 이제 그만! 아우슈비츠는 유대인에게만 비탄의 기억이 아니다... 독일인에게도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이다... 하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는 부분일 따름이다... 팔레스타인 침공과 학살과 피의 보복 때마다 국제사회 비난으로부터 든든한 방패가 되어준 것은 홀로코스트와 반유대주의다...

[백정우의 줌인 아웃] 다비드 별의 눈물은 이제 그만!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스틸컷.

아우슈비츠는 유대인에게만 비탄의 기억이 아니다. 독일인에게도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악몽이다. 하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는 부분일 따름이다. 중국공산당의 티베트 학살과 스탈린이 벌인 정적 숙청과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가해진 끝없는 박해의 역사. 수치상 월등하다고 논박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대인 후손들은 선조의 피를 수단으로 삼아 독일인의 참회와 배상과 죄책감을 독려하고 독촉하는 한편, 전 세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대가를 추수해왔다.

지난 60여 년간 홀로코스트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은 나치에 발가락이라도 걸쳤던 이들의 변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초점은 유대인이 겪은 참혹한 사건과 남겨진 슬픔에 맞춰졌고 그 어떤 경우에도 가해자의 특수성을 고려한 채 진행되는 법은 없었다. 때문인지 나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홀로코스트는 이제,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오죽하면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용어가 나왔을라고.

반면 이스라엘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유대인에 대한 모든 비판적 담론에 ‘반유대주의’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침공과 학살과 피의 보복 때마다 국제사회 비난으로부터 든든한 방패가 되어준 것은 홀로코스트와 반유대주의다.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피해자인 이스라엘이 전가의 보도로 쌓아 올린 ‘반유대주의’

영화계라고 다르지 않다. 장 뤽 고다르는 (알랭 바디우와 더불어) 반유대주의자로 일찌감치 낙인찍혔다. 여기서 말하는 반유대주의란 기준이 너무 단순하고 유치해서 실소가 터질 정도. 이를테면 이스라엘이냐, 팔레스타인이냐, 로 구분된 확연한 스테레오타입이고, 세상을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양분하겠다는 오만함에 다름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부정하는 세계를 긍정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순간, 또 다른 전체주의인 ‘반유대주의자’로 등재한다. 예컨대 고다르 영화를 옹호하면 나는 반유대주의자가 되는 식이다. 내가 아무리 스필버그 영화를 격찬해도 말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발 디딘 나약한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시대를 살아온 개인이 지닌 삶의 고유성만큼은 인정해야 마땅한 일일 터. 그러나 피해자(유대인)는 일고의 여지 없이 개인을 가해자 집단(나치)에 복속시켜버리곤 했다. 공적 기록에 사적 기억이 침투할 여지를 주는 순간 진실이 훼손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종반, 뉴욕의 화려한 아파트. 어린 시절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으며 지금은 명사가 된 유대인 여성은 당시 나치에 복무한 주인공이 남긴 유품을 받아든다. 시종 도도하고 당당한 그녀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바뀌던 순간, 하지만 나는 그 지점에서 쾌재를 불렀다. 한때 수용소 경비원이었던 안타까울 정도로 무지하고 순진한 어느 여인의 사적 진실과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의 무게추가 수평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사적 비밀과 기억의 가치를 그려낸 영화,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과 스티븐 달드리의 세밀한 연출이 돋보인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는 다비드 별의 눈물이 ‘홀로코스트’와 이별을 연습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진실로 그럴 때가 되었다. (생전에 고다르가 이 영화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지 자못 궁금하다.)

백정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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