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늘 ‘자연 상태’다. 토머스 홉스식으로 표현하면, 저편에서의 정의가 이편에서는 잔혹함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편의 기쁨이 상대편에게는 슬픔의 원인이 되고, 한쪽 당의 고통이 다른 당에는 기회로 작용한다. 지난번에 상대가 한 말을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무례하다고 화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곳, 그게 법사위다.
둘째, 법사위 소속 의원은 동료가 될 수 없는 이들이다. “한 번도 사람인 적이 없어” “형체가 사람 같다고 본인이 사람이라 생각하나 보네” 같은 대화를 법사위원들이 주고받는다. 그런 이가 판검사나 변호사 출신이라는 것이 놀랍다. 그들은 자신들 때문에 공동체가 적대로 분열하든 말든, 시민들이 얼굴 붉히고 싸우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셋째, 동료가 아니고 사람도 아니면 법사위원들은 서로를 어떤 존재로 볼까. “딸랑딸랑” “꼬붕” 정도는 애교다. 심할 때는 “아주 조폭 같다” “여자 깡패구먼”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미국 의회에서는 ‘거짓말쟁이(liar)’, ‘위선자(hypocrite)’ 등과 같이 ‘개인을 정형화해 표현’하거나, ‘비겁하게(cowardly)’처럼 ‘모욕을 목적으로 한 단어 선택’은 할 수 없다. 우리의 법사위에서는 서로를 정형화하고 모욕하는 것이 기본이다.
넷째, 단순히 도덕적 차원에서 문제인 걸까. “부엉이 바위에 긁혔냐?” “인간이 되세요, 인간이” 등의 정도면 국회법과 의원윤리강령에 규정돼 있는 ‘의원의 품위’나 ‘식견과 인격, 예절’의 의무를 저버린 법 위반자로 취급해야 맞을지 모른다. 최소한 ‘합리적 논의를 통한 공동 통치’를 뜻하는 ‘의회주의’의 파괴자라 해야 옳다.
다섯째, 법사위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모르고 있을까.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공포의 균형’을 통해 안전을 추구한다. 서로가 경쟁적으로 두려움을 부과하는 것이 ‘위험 회피’와 ‘이익 극대화’를 위한 각자의 ‘지배 전략’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국회 밖 관찰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법사위를 주도하는 의원들에게는 오히려 ‘합리적 선택’이다. “유튜브 찍으려고 이러는 거예요” “유튜브는 위원장이 잘 찍으시잖아요” 같은 유치한 말싸움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여섯째, 홉스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어느 특정인의 마음이 아니라 전 인민의 마음을 읽(기)”를 권고한다. 우리의 법사위 소속 의원들은 그럴 의사가 없다. 공공선의 추구가 아니라, 자기를 알아봐 주고 잘한다고 박수 쳐주는 ‘소수의 열정적 지지자’를 충족시키면 된다고 본다. 그게 득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당파적 열정을 앞세우고 팬덤 지지자에게 아첨하는 일로 바쁘다. 누가 ‘친윤 집회’에서 환영받고 누가 ‘유튜브 방송’에 즐겨 출연하는지를 보면 안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익 추구자들이다.
일곱째, 법사위는 야심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더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들이 주도한다. 법무부 장관을 하고 싶은가. 법사위로 가야 한다. 당대표가 되고 싶은가. 법사위에 기회가 있다. 경기도지사를 하거나 대통령을 꿈꾸려면, 법사위에서 먼저 판을 키워야 한다. 내용 있는 질의나 쟁점을 깊이 파고드는 토론 같은 것은 쓸모가 없다. 더 사나운 말과 거친 표현을 찾아야 하고,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여덟째, 물론 법사위에도 ‘동료 평가’가 작용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기묘하다. 상대 의원들로부터 적대적인 평가를 받을수록 좋다. 그래야 자기 진영과 팬덤 지지자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는다. 상식에 반하는 비윤리적인 보상 함수가 작동하는 곳이 법사위다. 악행을 두려워하지 말라. 일단 성공하면 과거의 오명은 다 잊게 돼 있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이재명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능력이 없어도 큰 자리를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법사위 의원들이 준칙으로 삼는 행동 원리다.
아홉째, 법사위는 바뀔까. 비난이 많으니 조심하지 않을까. 아닐 것이다.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성의 압박’은 늘 무기력했고, 지금처럼 하는 것이 ‘성공의 법칙’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누가 왜 달라지려 하겠는가. 헛된 기대는 냉소적 절망을 낳고, 헛된 분노는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양당 체제만 재생산한다. 차라리 이번 국회는 포기하고 다음 국회를 기다려보는 게 낫다. 주목받지 못하면 못 참는 야심가들에게는 외면이 더 현실적 응징일 수 있다.
박상훈 정치학자·태재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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