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년 임기를 마치고 오는 20일 퇴임한다. 그의 재임 기간 한국 경제는 고물가와 고금리, 경기 둔화, 환율 불안이 겹친 복합 위기를 거쳤다.
이 총재는 취임 직후 기준금리를 빠르게 끌어올리며 인플레이션 대응에 나섰다. 이후에는 성장과 금융안정 사이에서 쉽지 않은 선택을 이어갔다. 물가를 다시 안정권으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지만 저성장과 고환율의 그늘까지 걷어내지는 못했다는 지적도 함께 나온다.
물가와의 전쟁
이 총재가 2022년 4월 취임 당시 가장 먼저 마주한 과제는 분명했다. 경기보다 물가였다. 당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4.8%에 달했다. 한은은 같은 해 성장률을 2.7%로 보면서도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4.5%까지 높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공급 차질이 이어지면서 물가 불안이 빠르게 확산하던 시기였다. 성장 둔화 가능성을 감수하더라도 물가부터 꺾어야 한다는 판단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정책은 곧바로 긴축으로 이어졌다. 기준금리는 2022년 4월 1.50%에서 5월 1.75%로 오른 뒤 7월 2.25%, 8월 2.50%, 10월 3.00%, 11월 3.25%, 2023년 1월 3.50%까지 올라갔다. 약 9개월 만에 2.00%포인트 뛴 셈이다. 현재 기준금리는 2.50% 수준이다. 다만 2022년 4월 인상은 이 총재 취임 전 결정이라 이창용 체제 초반의 강한 긴축은 그해 5월 이후 본격화됐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굳어지기 전에 수요를 눌러야 한다는 판단이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다.
긴축 효과는 물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2022년 4월 4.8%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같은 해 여름 6%대를 찍은 뒤 점차 낮아졌다. 한은은 지난 10일 낸 통화정책방향 참고자료에서 “일시적 변수의 영향을 덜 받는 근원물가가 2%대 초반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근원물가는 농산물과 석유류 등 가격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해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다. 고물가 국면을 지나 물가를 다시 목표 수준 근처로 되돌린 것은 이 총재 재임기의 가장 분명한 성과로 꼽힌다.
물론 물가 안정이 오롯이 금리 인상만의 결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제 원자재 가격 흐름과 공급망 불안 완화, 기저효과 같은 외부 변수도 함께 작용했다. 다만 인플레이션 기대가 고착되기 전에 통화 긴축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한은이 중앙은행 본연의 책무를 비교적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가는 가능하다.
성장만 볼 수 없었던 한은
문제는 물가를 잡은 뒤였다. 성장과 금융안정, 환율이 동시에 충돌하면서 한은의 선택지는 빠르게 좁아졌다.
고금리는 내수에 부담을 줬다.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22년 2.6%에서 2023년 1.4%로 떨어졌다. 실질 GDP 성장률은 물가 상승 영향을 제거하고 경제가 실제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2024년에는 2.0%로 반등했지만 한은은 당시 민간소비와 건설투자 부진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반등 흐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지난해 연간 실질 GDP 성장률은 1.0%로 다시 낮아졌다. 한은은 건설투자 감소 폭이 커진 가운데 수출 증가세는 이어졌고 민간소비와 정부소비가 늘면서 가까스로 1% 성장을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총재 재임기 한국 경제는 물가를 잡는 데는 일정한 성과를 냈지만 내수와 건설투자 부진 속에서 성장의 기초체력까지 되살리지는 못했다. 다만 이를 통화정책의 실패로만 보기는 어렵다. 수출 여건과 세계 교역 둔화, 지정학적 충격 같은 외부 변수 역시 성장 경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지난 4년간 ‘이창용호’의 핵심 딜레마였다. 중앙은행은 경기가 나빠지면 금리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한은의 1차 책무는 물가 안정이다. 동시에 금융안정도 외면할 수 없다.
실제 한은은 2025년도 연차보고서에서 지난해 물가 상승률이 안정된 상황에서 성장률 둔화에 대응해 기준금리를 두 차례 인하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하반기에는 수도권 주택시장 불안과 환율 변동성 심화 등 금융안정 리스크를 고려해 금리를 동결했다고 적었다. 성장만 보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는 의미다.
한은은 최근 통화정책방향에서도 중동전쟁에 따른 공급 충격이 성장세를 당초 예상보다 더 둔화시킬 수 있다고 진단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높게 오래 유지한 정책이 소비와 투자에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장 부진의 원인을 모두 한은에 돌리기는 어렵다. 물가와 성장, 금융안정이 충돌하는 국면에서 중앙은행의 선택지는 애초에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금리 인하 막았다
이 총재가 금리 인하를 고민할 때마다 수도권 주택가격과 가계대출 흐름을 함께 언급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금리를 너무 빨리 낮추면 부동산과 부채가 다시 들썩일 수 있다는 우려가 늘 따라붙었다.
실제 한은은 지난해 가계신용이 증가세를 이어가다가 9월 이후 증가폭이 둔화됐고 가처분소득 증가율이 가계부채 증가율을 웃돌면서 전반적인 부담도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금융취약성지수 역시 장기평균보다 낮은 수준을 이어갔다. 빚의 절대 규모는 여전히 크지만 시스템 차원의 취약성은 일부 완화됐다는 것이 한은의 판단이다.
한은은 최근 통화정책방향에서도 “가계대출이 정부의 거시건전성정책 강화 기조 속에 낮은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수도권 주택가격 오름세는 정부 대책의 영향으로 둔화됐지만 추세적 안정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봤다. 이 대목은 이 총재가 왜 성장률 둔화 압력에도 금리 인하를 서두르지 않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장만 보면 더 빠른 완화도 가능했겠지만 금융안정까지 함께 놓고 보면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고환율이 드러낸 통화정책의 한계
환율은 이 총재의 4년을 평가할 때 가장 신중하게 봐야 할 변수다. 한은은 이달 10일 발표한 통화정책방향에서 원·달러 환율이 중동전쟁에 따른 달러 강세와 외국인 주식 순매도 등으로 1500원대로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원화 약세가 수입물가를 자극하면 물가 안정도 더 어려워진다. 외환시장 변동성이 커지면 자금 흐름 역시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이 총재 후반기의 금리 판단은 성장률뿐 아니라 물가와 환율, 가계부채까지 함께 살펴야 하는 문제였다.
다만 고환율을 한은의 실패로만 보는 것은 무리다. 환율은 기준금리 하나로 움직이지 않는다. 미국 금리와 달러 강세, 국제유가, 지정학 리스크, 외국인 자금 흐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한은이 금리를 통해 환율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2025년도 연차보고서가 하반기 금리 동결 배경으로 수도권 주택시장 불안과 환율 변동성 심화를 함께 적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금리를 내리더라도 그 속도와 폭을 조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환율을 둘러싼 비판은 자연스럽게 ‘한은이 시중에 돈을 너무 푼 것 아니냐’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은은 통화량 자체를 직접 목표로 삼아 돈을 푸는 방식으로 정책을 운용하지 않는다. 현재의 통화정책 운영 틀은 기준금리 중심 체계에 가깝다. 대신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시중 유동성을 조절한다. 통화안정증권과 환매조건부증권(RP) 매매, 통화안정계정 등을 활용해 자금을 흡수하거나 공급하면서 시장금리와 유동성 흐름을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 총재는 최근 한은이 돈을 풀어 환율이 올랐다는 비판이 나왔을 때도 비슷한 논리로 반박했다. 한은은 지난 1월 ‘최근 유동성 및 환율 상황에 대한 오해와 사실’ 자료에서 최근의 광의통화(M2) 증가율이 과거 평균 대비 낮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광의통화는 시중에 풀린 현금과 요구불예금은 물론 정기예금·적금 등 비교적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금융자산까지 포함한 통화 지표다. 당장 현금은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자금까지 포괄한 넓은 의미의 돈의 규모라고 볼 수 있다.
이 총재는 같은 달 기자간담회에서도 “M2 증가율 차이만으로 최근 환율 상승을 설명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한은 내부 논리로는 최근 환율과 물가를 유동성 과잉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금리 밖 과제까지 언급한 이유
이 총재가 임기 내내 구조개혁을 자주 언급한 것도 한은의 이런 한계와 맞닿아 있다. 금리로 물가를 잡을 수는 있어도 성장률과 생산성, 잠재성장률, 지역 격차까지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25년도 연차보고서도 미 관세정책의 영향, 가계부채 누증이 소비에 미치는 영향, AI 확산과 인구 고령화, 산업구조 변화 같은 현안을 한은이 연구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 총재는 취임 이후 ‘미스터 오지랖’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전략적 모호성을 미덕으로 삼아 온 전임 총재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의 발언은 통화정책이나 거시경제를 넘어 교육, 노동, 부동산 등 사회 전반으로 넓어졌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을 넘어선다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중앙은행의 한계를 누구보다 자주 확인한 총재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금리정책만으로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저성장까지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반복해서 마주한 결과라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힘과 한계 드러낸 4년
결국 이 총재의 4년은 성과와 한계가 모두 분명하다. 물가만 놓고 보면 그는 어려운 시기에 중앙은행 본연의 책무를 비교적 충실히 수행했다. 기준금리를 1.50%에서 3.50%까지 끌어올린 뒤 2025년 5월 2.50%까지 낮추는 과정에서 물가를 다시 2%대 초반으로 되돌려 놓았다.
하지만 성장과 환율,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저성장까지 함께 놓고 보면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고금리 부담 속에 내수는 약했고 환율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한계를 모두 한은의 실패로 돌리기도 어렵다. 전쟁과 달러 강세, 세계 교역 둔화 같은 외부 충격은 중앙은행의 금리정책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총재의 4년은 한은이 어디까지는 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할 수 없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시간이었다. 물가 안정에는 비교적 분명한 성과를 냈지만 성장과 환율, 구조개혁이라는 더 큰 과제 앞에서는 통화정책의 한계 역시 또렷하게 드러난 4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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