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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의 치매, 이야기-15] 조경란

추석이 지났다. 명절이면 흩어져 있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조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때다. 조경란의 을 읽으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나를 사랑해준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남겨야 할까.

[김은정의 치매, 이야기-15] 조경란

사랑을 빚으로 생각하면 미안함만 남아

사과보다 “고마웠어요” 한 마디 표현을

추석이 지났다. 명절이면 흩어져 있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조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때다. 조경란의 <달걀>을 읽으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나를 사랑해준 사람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남겨야 할까.

소설 속 ‘나’에게 가족은 이모 한 사람뿐이다. 두 돌 무렵 부모를 사고로 잃은 뒤, 국가대표 탁구 선수였던 스물일곱 살의 이모는 선수 생활을 접고 어린 조카를 키운다. 새벽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떼어다 팔며 나를 먹이고 입혔다. 이모는 나를 위해 삼만 번도 넘게 밥을 짓고 기도하고, 때로는 밤마다 울었다. 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을 키우는 데 고스란히 흘러간 것이다.

그런 이모에게 치매가 찾아온다. 아직 예순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잊던 이모는 결국 자신의 이름도, 평생 키운 조카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의 기억이 사라질수록 오래된 기억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나는 이모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어린 시절 이모가 불러주던 ‘이쁜 우리 장군이’가 되어준다.

그럴수록 마음은 무거워진다. 내가 자라는 동안 이모의 청춘은 흘러갔다. 사랑받은 기억이 어느 순간 갚을 수 없는 빚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이모의 죽음보다 마지막에 들을 말을 더 두려워한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혹시라도 그런 원망을 듣게 될까 겁을 낸다.

그러나 이모의 마지막 말은 달랐다.

“난 아직도 잠잘 땐 탁구공이 훅, 튀어 올랐다가 내려오는 꿈을 꾼단다.”

이모는 방긋 웃는다. 나는 그것이 마지막 말임을 알아차리고 큰 소리로 말한다.

“이모, 미안했어요.”

눈을 감은 이모는 다시 살며시 웃는다. 그제야 나는 생각한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마웠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부모의 희생을 깨달을수록 미안해한다.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식이 평생 부모의 사랑을 ‘갚아야 할 빚’으로만 기억한다면, 그것이 과연 부모가 바랐던 일일까. 이모는 자신의 희생을 말하지 않는다. 탁구공이 튀어오르는 꿈을 꾸면서도 조카와 함께한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

작품의 제목 ‘달걀’은 이런 마음을 잘 보여준다. 달걀은 어린 나에게 이모가 처음 먹여준 음식이지만, 심한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세상에 이모와 단둘이 남은 아이에게 그것은 이모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상실의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이모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옛 연인 가비를 찾아가며 형형색색 물들인 달걀을 선물로 준비한다. 두려움의 대상이 새로운 삶으로 가져가는 선물이 된 것이다. 이모의 사랑을 더 이상 빚이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빚으로 생각하면 미안함이 남는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감사가 남는다.

치매로 기억을 하나씩 잃어가는 부모 앞에서 우리는 자꾸 미안하다고 말한다. 더 잘해드리지 못해서, 받은 만큼 돌려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 자식을 사랑해온 부모가 마지막까지 듣고 싶은 말은 어쩌면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나를 사랑해주어서, 참 고마웠어요”라는.

/김은정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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