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판교 정보기술(IT) 업계는 전례 없는 호황으로 쾌재를 불렀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게임과 비대면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은 단연 ‘IT 개발자’였다. 졸지에 개발자들의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 됐고 업계 내에서는 “길게 다녀야 3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직 시장이 활성화됐다.
이달 10일 판교역 앞을 가득 메운 카카오 노조원들의 행렬은 위상이 달라진 ‘한국판 실리콘밸리’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주판알을 튕기며 이직을 고민하던 개발자들은 이제 “고용 안정”을 요구하고 있다. 아직 앳된 얼굴의 신입부터 연륜이 묻어 있는 시니어 직원까지 노란 피켓을 들고 절도 있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판교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한 IT 직원은 “조건 따져가며 골라서 이직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라며 자조 섞인 한탄을 쏟아냈다.
이들이 거리로 나선 배경에는 인공지능(AI)의 등장이 자리잡고 있다. 개발자 1명이 3~4인분의 몫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하며 활발했던 경력 이동은 옛말이 됐고 업계에서는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 8년 차 개발자는 “경력직 채용이 막힌 데다 지금 있는 회사에서도 AI로 대체될 수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다”고 토로했다. 고용 불안감 속에 ‘평생 직장’이 다시 미덕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네이버(2022년 말 5.99년→7.7년), 카카오(4.75년→6.25년)는 물론 넷마블(4.4년→5.9년), 엔씨소프트(6.2년→7.5년) 등 이직이 잦았던 게임사들의 근속연수도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다.
‘5차 산업혁명’으로 비견되는 AI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판교는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올랐다. 글로벌 빅테크들의 침투로 국내외 시장의 경계는 무의미해졌고 에이전트 AI, 피지컬 AI, 클라우드 등 새로운 먹거리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스스로 존재감을 증명하지 않고서는 기업도, 그 구성원들도 살아남을 수 없는 시기다. 이 거대한 대전환점을 앞두고 과거 호황기 때 ‘파이 나누기식’ 갈등에만 매몰된다면 결국 생존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 것이다. 노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술 격변기에 걸맞은 인력 체질 개선과 상생의 타협점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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